“응급실 다녀온 날 바로 야근”
무제한 노동ㆍ폭언ㆍ욕설 개선 없어
외주제작 프리랜서 비중 43%
근로계약 없이 쥐꼬리 급여 만연
고용부 실태조사 시작도 못하고
국회는 사각지대 법률 개정 뒷짐
“6개월 동안 일하며 외주 막내작가와 카메라 촬영 실장, 그리고 고(故) 이한빛 PD까지 3명의 죽음을 봤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혜윤(30ㆍ가명)씨는 프리랜서 조연출 3년 차에 접어든 올해 봄 결국 현장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드라마 제작을 꿈꿔왔고 대학도 관련 학과를 졸업했지만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 넣는’ 업무 강도에 폭언ㆍ욕설이 난무하는 분위기를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씨는 “심지어 응급실에 다녀온 날 야근을 했어야 할 정도”라고 털어놨다.
1년 전인 지난해 10월 26일, CJ E&M의 신입 조연출 이한빛 PD가 과도한 노동 그리고 이를 비정규직 스태프에게도 강요해야 하는 상황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사망 이후 열악한 방송 제작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랐지만 이날까지 바뀐 것은 거의 없다. 또 다른 ‘이한빛’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그늘 아래 여전히 신음하는 처지다.
여기엔 방송계의 외주제작 시스템이 있다. 25일 노동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구조조정을 겪은 방송사들이 대부분의 제작을 외주로 돌리면서 전체 노동시장에서 5%에 불과한 프리랜서의 비중이 방송계에서는 무려 43%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보니 ‘계약서 없는 고용’이 자리잡았고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이 발표한 방송제작스태프 계약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제작스태프 2,007명 중 76.2%(1,529명)가 서면 계약 없이 방송을 제작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약속보다 적은 급여나 장시간 노동 등 일방적인 노동조건 변경(55.1%ㆍ1,106명), 교통비 등 경비 미지급(51.2%ㆍ1,027명), 급여 체불(42.3%ㆍ848명) 등의 피해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관계부처, 국회 등은 뒷짐만 지고 있다. 이 PD의 사망사고 당시 방송계 전반의 근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빗발쳤으나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아 실태조사를 어떻게 실시해야 할지 사전논의가 길어졌다”면서 “이달 중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부처와 함께 조사를 시작할 것”고 밝혔다.
합법적인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 특례업종을 손보는 작업에서도 방송업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여야는 특례업종을 현행 26종에서 9, 10종으로 축소하기로 잠정합의를 이뤘지만 방송업은 포함되지 않았다.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프리랜서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건 그래서다. 방송업계 프리랜서는 일부 유명작가나 연출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용ㆍ종속 관계에 있어 근로자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김동현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각각 근로자성이 인정되는 프리랜서를 규정하고 있지만, 법원이 개별사안에 따라 결론을 달리 내리는 만큼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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