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스트롱맨의 시대인데 다 일으키기엔 힘이 달리나 봐.” 힙합 그룹 에픽하이는 신곡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에서 이같이 한반도 주변 정세를 언급하며 “위 앳 워”라고 랩을 내뱉는다. 한국과 밀접한 강대국에서 강성 지도자들이 부상하고 그들의 장기 집권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북핵 문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긴장감이 극대화되고 있는 데 대한 걱정으로 읽힌다. 에픽하이는 “알 권리 세례 속에 살 권리를 잊게 하는 미디어”라며 공익을 가장한 언론의 사생활 침해를 꼬집기도 한다. 에픽하이 멤버인 타블로는 2010년 학력 위조 의혹에 휘말려 언론의 집중 포화 속에 삶이 초토화될 뻔했다. 그간 낸 앨범마다 풍자가 풍년이었던 에픽하이의 비판의 날은 무뎌지지 않았다. 에픽하이는 지난 23일 9집 ‘위브 돈 섬씽 원더풀’을 냈다. 2014년 ‘신발장’을 낸 뒤 3년 만의 정규 앨범 발매다.
“애 키우는 게 만만치 않네”란 힙합 전사들
에픽하이 세 멤버인 타블로, 투컷, 미쓰라진의 평균 나이 36세. 20대 초반인 2003년에 데뷔해 14년이 흘렀다. 힙합 전사들의 이야기엔 자연스럽게 살이 붙었다.
“안녕하세요, 아재 유부남 힙합 그룹 에픽하이입니다.” 24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 새 앨범 인터뷰를 위해 취재진과 만난 에픽하이는 ‘아재개그’로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에픽하이 세 멤버는 모두 가장이다. 막내인 미쓰라진을 제외하곤 두 멤버는 육아에 허덕이는 아빠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삶이 변하면 창작물도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에픽하이 새 앨범엔 ‘어른 즈음에'가 실려 있었다. “애 키우는 게 만만치 않네”라며 “전화 끊을 때마다 인사대신 약속하는 술 한잔하기 참 힘드네”란 랩이 정겹기만 하다. 이렇게 구수한 랩이라니. 염세적인 가사로 이름 난 에픽하이이는 앨범 제목까지 ‘우린 훌륭한 어떤 걸 지금껏 해왔다’는 뜻으로 지었다. 데뷔 후 가장 긍정의 기운이 넘친다.
“올해로 음악을 한 지 14년이 됐어요. 음악을 지금까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솔직히 못 했어요. 음악을 하면서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했죠. 되돌아보니 ‘놀라운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앨범 만들 때 참 아름다웠다는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섬씽 원더풀’을 제목으로 지었죠. 참 에픽하이답지 않은 긍정적인 제목이죠? 하하하.”(타블로)
송민호 랩 논란 ‘노땡큐’는…
이번에도 에픽하이 새 앨범은 ‘종합선물세트’다. 가수 아이유부터 오혁까지. 에픽하이는 10명이 넘는 인기 가수를 섭외해 앨범에 실린 11곡을 다채롭게 꾸렸다. 이중 아이유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연애소설’과 오혁이 함께 한 ‘빈차’는 멜론 등 주요 음원차트에서 음원 공개 이틀째인 24일까지 1~2를 휩쓸고 있다. ‘연애소설’은 아이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노래의 달콤함을 더하고, ‘빈차’는 오혁 특유의 쓸쓸한 목소리가 곡의 맛을 살린다.
섭외는 어떻게 했을까. 타블로는 “아이유 공연에 게스트로 섰는데 ‘다음에 피처링 부탁하면 해줄 거죠?’라고 했더니 ‘네’라고 답했다”며 “그때 섭외를 해 아이유에 어울릴 수 있는 곡을 만들어보자고 해 곡을 만든 뒤 함께 했다”고 말했다. 오혁에겐 가이드 음원(반주만 녹음된 미완성 노래)을 보냈더니 휴대폰으로 5분 만에 답장이 와 “이 노래 너무 좋다”고 해 성사됐다. 타블로는 앨범마다 피처링을 많이 쓰는 이유에 대해선 “멜로디 있는 곡을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해 함께 부를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답했다.
새 앨범 반응은 좋지만 악재도 따랐다. 수록곡 ‘노땡큐’가 구설에 올랐다. 아이돌 그룹 위너 멤버인 송민호가 랩 피처링한 가사 ‘Mother****만 써도 이젠 혐이라 하는 시대’가 문제가 됐다. 단순히 욕을 해서가 아니다. Mnet 음악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여성 비하 랩을 해 사과까지 한 래퍼가 ‘뭐만 써도 혐(혐오의 줄임말)’이라고 해 일부 청취자들의 비판을 샀다. 여성 비하 문제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타블로는 “진심으로 그런 의도(여성 혐오)로 곡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곡의 맥락을 얘기하자면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로 남을 비판하는 그런 세태를 살짝 꼬집는 노래”라며 “자기 자신의 자아를 찾자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노래”라고 해명했다.
에픽하이는 데뷔 날인 10월 23일에 맞춰 9집을 냈다. 새 앨범을 낸 에픽하이는 11월 3일과 4일 용산구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공연 한다. 힙합신에선 드물게 14년 동안 팀을 유지해 온 세 사내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한 일은 무엇일까. 모두 비슷한 순간을 떠올렸다.
“에픽하이 한다고 했을 때요.”(미쓰라), “처음엔 객원 멤버였어요. 전 디제이잖아요. 그러다 타블로형이 ‘멤버 할래?’ 라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할래’라고 답했던 순간요.”(투컷), “포기할 수도 있었던 시기에 버티고 다시 도전했던 순간요.”(타블로)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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