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많은 고유명사가 등장하는 소설은 근래에 드물 것이다. 제목대로라면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이라고 할까. 송수정, 이기윤, 권혜정처럼 익숙한 이름들부터 브리타 훈겐, 스티브 코티앙 같은 외국 이름까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각 자기에게 적합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이미 예고된 대로, 고유명사로 이름짓기는 정세랑을 다른 작가와 구별 짓는 뚜렷한 징표 같기도 하다.
소설 속 고유명사가 낯선가? 소설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이란 장르는 신과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서사시나 비극과 달리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출발한다. 위대한 소설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작품들이, 소설이 아니라면 결코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을 ‘어떤’ 개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택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준다. 돈키호테, 엠마 보바리, 그리고 빌헬름 마이스터를 보라!
그러나 위대한 소설의 시대가 저물고 현대성의 황혼이 운위됨과 동시에 소설은 이름을 잃어 버렸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의 고유한 이름 대신 그 혹은 그녀를 소설의 동반자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때로는 성으로만, 또 때로는 이니셜로만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이 인물들은 정세랑의 인물들과 명백히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정세랑이 그려내고 있는 이 ‘명백히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 시대의 저 끔찍했던 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이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또 발밑이 훅 꺼지면...”이라는 공포와 불안이다. ‘피프티 피플’의 인물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게 간발의 차다”라는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느닷없이 맨홀에 빠지고, 갑작스럽게 괴한의 칼에 목을 찔린다. 세상은 온통 “날림”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들의 생사를 가르는 것은 오로지 “나쁜 확률 문제”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세랑은 애초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모두가 춤을 춘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었다고 ‘작가의 말’ 말미에 적어놓고 있다. 이 제목은 우리가 알다시피 ‘피프티 피플’로 바뀌었다. 그녀는 알았던 것이다. “보살이 아니라 아수라가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 넷, 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건 팥밖에 없고. 팥 정도 밖에 없”을 때, 문학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를.
그녀는 말한다. 한때 나와 손을 맞잡았을 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그것은 간발의 차로 우리와 운명을 달리하게 된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최소한의 장치이자 소설의 시작이라고. 위대한 이름의 시대는 이렇게 다시 행진한다. 송수정, 이기윤, 권혜정... 우리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304명이 있기 때문이다.
신수정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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