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송합니다’는 ‘데이터 속 숨은 의미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로, 사회 속 데이터들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숨겨진 문제를 포착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신라 경문왕의 신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털어놓은 대나무숲. 1,000년도 더 지난 요즘 대학생들 역시 ‘대나무숲(대숲)’에 속내를 털어놓는다.
물론 진짜 숲이 아닌 온라인 숲이다. 지난 2013년 서울대를 시작으로 현재 약 10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익명 커뮤니티 ‘○○대 대나무숲’을 운영한다. 학생들이 페이스북 메시지 등으로 사연을 보내면 대숲 관리자가 이를 익명 처리해 게시한다.
여기 올라온 사연을 분석해 대학생들의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살펴봤다. 올 1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12개 대학 대숲에 올라온 글을 수집하는 크롤링(crawling)을 통해 9,832건의 글을 모았다.
분석 대상은 대숲 누적 게시글 3만개 이상 대학 중 지역과 학교 특성을 고려해 선정했다. 선정 대학은 고려대, 동국대, 동덕여대, 서울여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순천대, 숭실대, 아주대, 연세대, 영남대, 중앙대(가나다순)다. 여대는 누적게시물이 3만개 미만이었지만 여대생만의 불안을 보기 위해 포함시켰다.
불안ㆍ걱정ㆍ스트레스 사연 913건 중
연애ㆍ학교생활 고민이 1,2위
학업ㆍ진로 관련 글은 9위 그쳐
이중 불안ㆍ걱정ㆍ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언급된 913건(9.3%)을 추출해 각 사연에 담긴 주된 불안요소를 분류했다. 사연 중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연애(379건)였다. 연애고민 수는 압도적이다. 2위인 학교생활(145건)부터 6위인 건강ㆍ외모(41건) 글까지 모두 합해야 1위와 비슷하다. 반면 대학생의 주된 고민이었던 학업ㆍ진로 관련 글은 32건으로 9위에 그쳤다. 경제문제나 일 관련 불안은 각각 13위(14건)와 14위(13건)였다.
이는 지난 3월 새 학기를 맞이한 대학생들의 고민을 설문조사한 내용과 사뭇 다른 결과다. 모바일서비스기업 엔비티(NBT)가 대학생 993명을 대상으로 한 당시 조사에서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취업(39.7%), 경제문제(20.6%) 등이었다. 이성문제는 2.7%에 불과했다.
“친구 만들기가 어렵네요” 등 학교 사연 절반이 ‘관계불안’
상위권을 차지한 불안의 핵심에 ‘관계’가 있다. 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를 보면 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친구(1,428회), 사람(1,118회), 남자(479회), 여자(473회)등 관련있는 인물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엄마(330회)나 부모님(196회)등이 언급되면서 가족관계 관련 글도 3번째로 많았다.
학교생활 및 일 관련 글에서도 가장 큰 불안요소는 관계다. “개인 사정으로 오리엔테이션을 가지 못했더니 친구를 만들기 어렵네요”, “후배를 완전 밑바닥 보듯 행동하는 조교 때문에 휴학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요” 등의 고민이 학교생활 관련 고민의 42%(61건)를 차지한다. “알바 사장님이 사람들 앞에서 제게 망신을 줍니다.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한 사회생활이라지만 그냥 참고 견뎌야 할까요” 같은 고민 역시 일 관련 고민의 54%(7건)를 차지했다.
건강∙외모 등의 사연에서도 관계에 대한 고민이 상당부분 들어있다. 건강∙외모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불안이 더 큰 경우가 3분의 1이상(36.6%)이었다. 사춘기 시절 건강∙외모 때문에 상처를 입어 치유되지 못한 경우(“틱장애를 앓던 중학교 때 같은 반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한 이후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요”), 이성의 외모 지적(“남자친구가 매일 살 좀 빼라 합니다. 저도 제 남친에게 이쁨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네요”), 친구와 외모 비교에 따른 스트레스(“다이어트 중인데 누가 봐도 마른 친구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살쪘다고 말해서 스트레스 받아요”) 등이 대표적인 건강ㆍ외모 관련 관계성 고민이다.
“관계 결핍 세대의 또래 소통장 대숲”
“관계 문제를 관계로 풀지 못하고 ‘익명’에 기대는 것”
이처럼 대학 대숲에서 취업 문제 대신 관계에 대한 고민이 두드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타인과의 관계가 청년세대의 주요 고민이지만 양상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전 세대의 관계 고민이 ‘더 좋은 관계를 많이 맺고 싶다’는 과잉 양상이라면, 형제와 동네 친구 없이 자라 관계 경험이 과거보다 희박한 현 청년들은 관계 결핍이나 과소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숲은 또래사이의 소통 창구이기에 진로나 취업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생존해야 하는 청년 세대는 생존을 위해 SNS에서도 긍정적인 자아상을 포장해야 하기에 단점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며 “개인 평판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만큼 관계로 촉발된 고민을 관계로 해결하지 못하고 익명성에 기대는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이혜미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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