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수신인: 박근혜, 수용번호 503호
발신인: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
시위가 일상인 젊은 날을 보냈지만 운 좋게 경찰서 유치장 구경도 못해 본 터라, 수인(囚人)의 삶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출소한 선후배들 환영회에서도 ‘뺑끼통’과 ‘칼잠’ 따위 얘기가 우스개 삼아 오갔을 뿐입니다. 격리된 공간에서 겪었을 고통과 번민이 발화(發話)되는 순간, 흰 두부를 물고 애써 웃던 그들도, 우리도, 고작 거리에 나갈 용기조차 집어삼킬 깊은 두려움이 기어이 발화(發火)하고 말 것을 더 두려워했던 까닭입니다.
몰랐거나 모르고 싶었던 수인의 삶을 엿보게 된 건, 고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을 통해서입니다.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꼬박 20년을 복역한 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입니다. 깊고 아름다운 사색의 기록들 가운데 가장 울림이 컸던 편지의 한 토막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여름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 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C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이 글이 떠오른 건 당신이 국제법무팀 MH그룹을 통해 유엔 인권기구에 인권침해 피해를 호소한다는 CNN 보도를 접하고서입니다.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 적절한 치료도, 제대로 된 침대도 제공받지 못해 병이 악화했다고 하더군요. 블랙리스트 같은 추악한 인권범죄에 연루된, 게다가 ‘황제 수형생활’ 논란까지 인 당신에게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리비아 독재자 가다피의 차남 등 거물급 국제범죄자를 변호해 온 MH그룹에 의뢰를 한 건 당신을 지지하는 재미교포들이라지요. 지지층 결집을 위한 언론플레이거나 해외망명 노림수란 분석도 있네요. 무엇보다 황당한 건 MH그룹이 이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상태를 직접이든 간접적으로든 ‘조사’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당신도 구치소에서, 그리고 재판절차를 통해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감히…”라고 비난하거나, 가십에 지나지 않는 침대나 변기 얘기를 환기하고 “편한 데서 지내고 싶었으면 죄를 짓지 말든가”라며 조롱할 생각은 없습니다. 체감 고통의 크기와 강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차라리 밥 세 끼 먹고 몸 뉠 곳 있는 감옥이 낫다며 제 발로 들어가는 이도 있고, 일반 수형자보다 10배 넓은 방에서 갖가지 특혜를 누려도 지옥처럼 느낄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주장하고 호소하는 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다만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끔찍해 하는 그곳 환경이 그나마 나아진 건 당신의 부친이 권좌에 있던 시절부터 재소자 인권을 위해 교도소 안팎에서 줄기차게 싸워 온 이들 덕분입니다. 당신은 알 리 없지만, 단 한 뼘의 진보를 위해 유일한 투쟁수단인 단식을 하다 징벌방에 갇히고 사지를 붙들린 채 강제급식을 당한 이들도 숱합니다. 과밀수용이나 미흡한 의료서비스 등을 개선하는 싸움은 현재진행형이고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당신의 주장이 철없는 투정으로 치부되지 않고, 수형 환경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려면 사실부터 챙기고 합당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읽히지 않을 편지에, 부질없는 한 마디 더 보탭니다. 앞서 소개한 신영복 선생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한데, 당신의 불행은 자기혐오에도 이르지 못하는 지독한 자기연민 탓이 아닐는지요.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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