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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여순(여수ㆍ순천)사건(10.19)

입력
2017.10.1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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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으로 숨진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 사건으로 숨진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승만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 2,000여 명이 제주 4ㆍ3 진압 명령에 반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명의로 배포된 호소문(‘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에는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적혀있다. 주축은 남로당원이었다.

이승만을 포함한 역대 정부가 군사반란이라 규정했던 여순사건을 재야 진보 사학계가 ‘항쟁’이라고 부르는 배경이 저 호소문에 있다. 면밀한 계획 없이 일으킨 사건이었고, 국가 전복이나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한 봉기가 아니었다는 게 ‘반란’이 아닌 근거다. 4ㆍ3진압(동족상잔) 거부의 명분은 숭고하지만 그렇다고 항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들이 지역 경찰 간부와 우익계 인사ㆍ가족 등 150여 명을 인민재판 형식으로 살해하고 약탈ㆍ방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당시 모병제로 병사를 모집, 경찰에 쫓기던 좌익 청년들과 빈농ㆍ빈민 노동자들이 대거 입대했다. 군대 조직사업을 위해 남로당에서 당원을 조직적으로 입대시키기도 했다. 4ㆍ3 진압명령은 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14연대는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고 보성 고흥 광양 구례까지 세력을 확산해갔다. 그게 ‘점령’이 아니라 월북을 위해 지리산으로 진출하기 위한 경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들은 22일 투입된 진압군과 시가전을 포함,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27일 진압됐다. 일부는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진압 과정에서, 또 진압 이후 시민 약 2,500여 명이 진압군에 의해 학살됐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직후 대대적 숙군 작업을 벌였다. 남로당 비밀당원이던 육군 정보국 소속 박정희가 적발된 게 그 때였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김구’ 제거를 위한 정치선전 재료로도 활용했다. 그들은 반란 배후 조사 발표 등을 통해 ‘극우 정객’이 공산주의자와 결탁해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라고 밝혔다. ‘극우 정객’이 곧 김구였고, 물론 터무니 없는 조작이었다. 김구는 10월 말 공개 담화를 통해 여순사건을 “반도들에 의한 반란 테러”로 성토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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