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단 두 번 열리는 신들의 숲, 성황림(城隍林)
치악산 남쪽 원주 신림면은 동으로 영월, 남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신림(神林)은 이름 그대로 신들의 숲이다.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마을 주민들이 수호신으로 떠받드는 성황림 때문이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4월 8일과 9월 9일(올해 양력으로는 10월 28일) 숲 속 서낭당에서 성대하게 제를 올리는데, 외지인에게도 이때만은 출입을 허용한다.
토지와 마을을 지켜준다는 서낭신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이다. 주민들이 타지에 나갔다 돌아오거나, 외지인이 들어올 때 마을에 동티가 나지 않게 서낭신에게 고하던 풍습에서 유래했다. 주로 고갯마루나 마을 입구의 큰 나무에 신이 산다고 믿었고, 더러는 당집을 만들어 모시기도 했다. 마을을 드나들며 서낭신에게 고할 때마다 돌 하나씩을 쌓아 올려 돌무더기나 돌탑이 생겨났고, 나무에는 하얀 종이와 솔가지, 숯을 매단 금줄을 둘렀다. 이때 오른쪽으로 꼰 새끼는 악귀가 풀 수도 있다고 여겨 꼭 왼새끼를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서낭당 정면에 신주가 위치하기 마련인데, 성황림의 당집에는 오른편에 모시고 있다. 방위상 북측이 윗자리라 여긴 때문이다.
성황림이 위치한 성남리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의 군사가 영월로 진출한 길목으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원주의 중심지였다. 원래 윗당숲, 아랫당숲으로 구분할 만큼 제법 큰 숲이었는데 1970년대 홍수로 쓸린 이후 지금은 윗당숲만 남아 10여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규모다. 그럼에도 온대지방을 대표하는 활엽수림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고, 민속자료의 기능도 갖춰 천연기념물(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숲 양쪽을 흐르는 얕은 하천이 식물의 생장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소나무 귀룽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찰피나무 말채나무 등 50여종의 목본과 다양한 초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낭당 양편에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엄나무 한 그루가 호위무사처럼 버티고 있다. 전나무는 중동이 부러졌지만 높이가 30m에 이를 만큼 기운차다. 전나무 못지않게 우람한 10여그루의 복자기는 성황림에서 단연 돋보인다. 유난히 단풍이 고와 화살나무와 함께 만산홍엽을 대표하는 나무로 높은 가지 끝에서부터 발갛게 물들고 있다.
세계적 산골 박물관, 고판화박물관
신림에서 영월 주천면으로 이어지는 황둔리 산골에는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고판화박물관이 있다. 동국대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군종장교로 복무한 한선학 관장이 세운 박물관이다.
“조각을 전공했는데 승려의 길을 걸으면서 작가가 되지 못한 한이 있었고, 국방부에 근무할 때 중국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목판과 ‘스파크’가 일었죠.” 그가 고판화를 모으기 시작한 연유다. 승려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돈 되는’ 아이템이라는 사실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침 중국과의 교류가 물꼬를 틀 무렵이었고, 한국의 고판화가 1,000만원을 넘나들던 시기에 중국 물건은 1만원 안팎에 구입할 수 있었다. 몇천만 원이면 중국 고판화를 싹쓸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화상과 딜러를 접촉했다. 중국이 한국처럼 발전하면 기회가 없어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수집가와 인사동 상인들은 어리석다고 비웃었지만, 한국 고판화 가격은 떨어지고 중국 것은 100~200배나 오른 지금은 오히려 부러워한단다.
이렇게 수집한 중국 일본 몽골 티베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고판화(원판과 인쇄본 포함)가 4,000여점이고, 개중에는 가격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도 여럿이다. 대표적인 것이 국내 유일의 한글로 된 오륜행실도 목판이다. 일본의 전통 화로인 ‘이로리’ 받침과 바람막이로 재활용된 사실이 알려져 더욱 주목받은 작품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달 공개한 목판도 관심을 끌었다. 이 역시 19세기에 새긴 한글소설 목판 5장을 사용해 일본식으로 윗면과 옆면을 장식한 보석함이다. 오륜행실도 목판은 상설 전시하고 있고, 보석함은 27일부터 열리는 ‘나무와 칼의 예술-동양 명품 고판화’ 특별전에서 선보인다. 이 외에도 박물관이 소장한 7개 작품이 강원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달 27~28일에는 이곳에서 ‘세계 고판화문화제’가 열린다. 산동네 작은 박물관이 고판화계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셈이다. “문화제를 왜 서울에서 안 하고 이곳에서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중앙집중 문제는 경제보다 문화 분야가 더 심각합니다. 분산이 절실하죠. 이런 시골도 필요하다면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6차 산업이죠.” 박물관 옆에 자리한 너와지붕의 8각 목조건물 명주사 대웅전도 눈길을 끈다. 그의 명함에는 ‘고판화박물관 관장’과 ‘치악산 명주사 주지’ 직함이 앞뒤로 찍혀 있다.
한국어 성경의 산실 용소막성당
신리IC에서 가까운 구학산 자락 용암리에는 시골 성당의 아늑함이 느껴지는 용소막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횡성의 풍수원성당과 원주(원동)성당에 이어 1904년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현재 모습은 1915년 공소로 있던 초가를 허물고 벽돌로 지은 건물이다. 옆 마당의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가려져 외부에서는 첨탑만 겨우 보일 정도로 아담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종(鐘)이 공출되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창고로 사용하는 수난을 겪었으나 1986년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용소막성당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마을이 한국 성경 번역의 선구자인 선종완(1915~1976) 신부가 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한국어로 단독 번역했고(1955~1968), 문익환 목사와 공동 번역도 진행했다. 성당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그의 생가터 표지석이 세워졌고, 성당 옆 유물관은 성경 번역에 열정을 바친 그의 의지와 헌신으로 채웠다. 성당 뒤편 ‘십자가의 길’은 솔숲이 울창한 산책로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림역이 위치한다. 애초 성당을 지으려 했던 터인데, 수염이 긴 어느 노인이 30년 후에 철마가 지날 자리라고 일러줘서 현재 위치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지었다는 뒷얘기가 전해진다. 중앙선 직선화 공사가 끝나는 2019년 무렵이면 신림역도 문을 닫게 된다.
원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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