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원로 배우 신성일(80)이 인사말 대신에 건넨 명함에는 오로지 영화만을 위해 살았던 그의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영화배우는 저의 영원한 명함입니다.” 백발 노신사의 얼굴에 자부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청춘스타’ 신성일이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부산을 찾았다. 15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마주한 신성일은 “어느새 나이 여든 살인데 적당한 때에 회고전을 열게 돼 기쁘다”며 오랜만에 관객을 만난 소감을 밝혔다.
신성일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2013년 ‘야관문’에 이르기까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 500여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출세작 ‘맨발의 청춘’(1964)을 비롯해 ‘초우’(1966) ‘안개’(1967) ‘장군의 수염’(1968) ‘내시’(1968) ‘휴일’(1968) ‘별들의 고향’(1974) ‘길소뜸’(1985) 등 대표작 8편이 상영된다.
신성일은 숱한 출연작 중에서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가장 특별하게 기억했다. 훗날 현빈과 탕웨이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만추’는 한국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지만 원본 필름이 소실돼 현재는 볼 수가 없다. “납북됐던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증언하기를, 당시 김일성이 ‘만추’ 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다더군요. 그 영화를 굉장히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북한에서 빌려 와서라도 관객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뛰어난 영상미를 보면 이만희 감독의 진가를 알게 될 겁니다. 제가 꽤 매력 있게 나오고 상대역 문정숙도 빛이 납니다.”
이번 회고전 상영작 중에선 ‘휴일’을 추천했다. 역시 이만희 감독의 1968년 작품으로, 당시 정부의 검열로 인해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으나 훗날 필름이 발견돼 세상 빛을 봤다. “실의에 빠진 젊은이가 주인공인 영화예요. 희망 없는 사회 분위기를 담고 있죠. 그때 정부가 마지막 장면을 수정하면 상영 허가를 내준다고 했는데 제작자가 끝까지 거부했어요. 저도 그 일을 계기로 사회 의식에 눈뜨게 됐죠. 그 영화 제작자가 바로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인 전옥숙 여사예요.”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1시간 가량 영화 밖 뒷이야기를 풀어놓는 신성일은 여전히 활기차고 꼿꼿했다. 지난 6월 폐암 3기 진단을 받았지만 의료진이 “기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건강이 호전됐다. 이미 새로운 계획도 세워놨다. 현재 ‘행복’이란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 중이고, 내후년에는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영화화할 생각이다. “2년치 영화 활동 계획도 잡혀 있고, 죽으면 묻힐 장소까지 이미 마련해 뒀어요. 이젠 아무 유감 없습니다.”
부산=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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