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가객 고 김광석. 요즘처럼 그가 그리운 적이 있었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하는 그와 관련된 소식들에 가슴 아프지만, 그럴수록 그의 노래가 더욱 듣고 싶다.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지 21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김광석이 부른 아름다운 선율이 드리웠던 작품들을 통해 그를 추억해보자.
한석규가 흥얼거리던 ‘거리에서’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중략)…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죽음을 앞둔 정원(한석규)은 주룩주룩 내리는 창 밖 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흥얼거린다. 들릴 듯 말 듯 쓸쓸하게 부르는 노래는 김광석의 ‘거리에서’(동물원 1집ㆍ1988)다. 한석규의 청량한 목소리와 정원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거리에서’의 가사가 더욱 가슴을 적신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라는 가사가 영화 속 정원의 마음을 대신한 것 같아 더욱 절절하게 들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정원과 주차 단속반 다림(심은하)이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담겼다. 점점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는 정원, 그리고 삶의 의욕을 주며 밝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다림이 그리는 안타까운 사랑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한석규는 2013년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거리에서’에 얽힌 사연을 공개한 바 있다. 한석규는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던 팬임을 밝히며 “영화 시나리오에는 ‘거리에서’를 부르는 장면이 없었지만 허진호 감독에게 넣어 달라고 했다”며 “그게 김광석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삼천포와 윤진이가 만난 김광석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해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깔려있다고.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습니다.”
김광석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tvN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유독 김광석의 곡을 사랑했다. 특히 ‘응답하라 1994’(2013)에서는 고인의 육성을 담아 추억을 소환했다. 삼천포(김성균)와 윤진(도희)이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간 장면에서다. 하필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날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김광석. 이 운명의 장난을 그 역시 믿기 힘들었던 듯하다.
김광석은 관객들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돼 가는 그런 모습이 많다”며 “오늘 비상식적인 일이 또 한 번 벌어졌더라”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실에 놀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응답하라 1994’는 목에 하모니카를 걸고 기타를 둘러 맨 고인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마치 1년 후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작별을 말하듯이. 김광석은 1996년 1월6일, 그러니까 당시 콘서트를 끝내고 7개월 뒤에 사망했다.
류준열의 쓸쓸함 담은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삼각관계는 언제나 가슴 시리다.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tvN ‘응답하라 1988’은 덕선(혜리)을 사이에 둔 정환(류준열)과 택(박보검)이의 삼각관계가 안타깝게 다가왔다. 덕선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정환과 아찔한 입맞춤으로 덕선을 향해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택이의 상반된 모습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정환의 이러한 마음을 잘 드러내 준 노래가 바로 김광석의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김광석 3집ㆍ1992)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전주는 시청자의 마음도 울렸다.
‘응답하라 1988’은 유독 김광석의 노래를 많이 들려줬다. 서울대를 다니는 보라(류혜영)가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성동일)에게 혼날 땐 ‘광야에서’가 흐른다. 선우(고경표)와 보라가 사귀는 사실을 알게 된 선영(김선영)과 일화(이일화)가 머리를 싸매고 누울 때는 ‘기다려줘’(김광석 1집ㆍ1989)가 배경 음악으로 깔린다. 미란(라미란)과 일화, 선영 등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며 나올 때는 ‘일어나’(김광석 4집ㆍ1994)를 흘러 보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김광석 2집ㆍ199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김광석 4집), ‘바람이 불어오는 곳’(김광석 4집) 등도 ‘응답하라 1988’을 채우며 명품 드라마로 만들었다.
조승우의 열연 빛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하나도 안 변했어. 지금도 옛날처럼 예뻐.” 영화 ‘클래식’(2003)에서 준하(조승우)는 전쟁터에서 시력을 잃었지만 주희(손예진)에겐 이를 들키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 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 속에 첫 사랑으로 기억되며 애틋한 마음을 키워왔다. 그렇게 성인이 됐지만 어찌 사랑의 감정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두 사람. 택시에 내려 걸어 들어오는 준하와 그를 바라보는 주희. 여전히 예쁘다는 말을 들은 주희는 “나 많이 늙었어”라며 웃는다. “왜 결혼 안 했어? 난 벌써 했는데”라는 준하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는 주희를 배경으로 ‘너무 아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흐른다.
옛 사랑의 안타까운 만남은 준하가 시력을 잃은 사실을 알아 챈 주희의 눈물에 더욱 슬퍼진다. 전날 이 카페에 와서 동선을 연습했던 준하. 그러나 그의 슬픈 연극은 주희가 그의 눈가에서 손을 흔들어보는 장면에서 무너져 내린다.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생각이 안 나네.” “그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순수했어.” 연이은 준하의 말에 눈물로 범벅이 된 주희는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이 장면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선율을 타고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은 남겼다.
송강호가 외친 “광석이!”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광석이를 위해서 한 잔 하자!” 북한군 오 중사(송강호)의 입에서 김광석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한 군인들의 긴장된 순간을 풀고 조이는 대목에서 김광석을 내세운다. 오 중사가 어머니가 생각난다며 김광석을 그리워한 저 장면에서 흐르는 곡이 ‘이등병의 편지’(다시부르기 1집ㆍ1993)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군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곡으로 지금까지도 울림이 크다.
영화는 형제처럼 우애를 뽐내던 남북한 군인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순간도 김광석의 노래로 채웠다. 총에 맞은 수혁(이병헌)이 다리 위에 쓰러진 장면은 김광석의 유작 앨범에 속한 ‘부치지 않은 편지’(1998)가 안타까움을 더한다.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이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중략)…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그대 잘 가라’
영화는 끝날 때까지 김광석의 목소리를 부여 잡는다. ‘그대 잘 가라’며 하늘로 떠난 주인공들의 넋을 기리는 듯 엔딩크레딧에도 ‘부치지 않은 편지’는 흐른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언급할 때 김광석이 저절로 떠오르는 이유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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