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최고실적 기록한 날 용퇴
삼성 반도체 세계 1위 올린 일등 공신
‘삼성 대표’란 부담감인가,
앞장서 새 시대 열겠다는 책임감인가
삼성전자 권오현(65) 부회장이 13일 자진사퇴를 선언하며 삼성은 물론 재계에 충격파가 몰아치고 있다. 권 부회장은 세계 1위 ‘삼성 반도체 신화’의 선봉장이자 올해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 청와대 행사 등에 삼성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는 등 ‘삼성의 얼굴’로 활동했다. 컨트롤타워의 부재 속에 최후의 버팀목이었던 전문경영인 출신 최고경영자(CEO)가 갑자기 용퇴를 선택한 이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날 권 부회장이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DS) 부문 사업책임자와 겸직중인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직을 사임할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권 부회장은 삼성전자 이사회 사내이사와 의장직도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면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권 부회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퇴를 고민해 왔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32년간 몸 담은 회사를 떠나는 이유를 밝혔다.
명목상으로는 후배들에게 새 길을 열어줘 한 차원 높은 도전과 혁신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지만, 삼성이 총수 부재란 미증유의 위기상황이라 삼성 내부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용퇴다. 권 부회장은 “곧 옥중에 있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사퇴 의사를 밝히기로 했다”며 이 부회장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자의적 결정이란 것을 분명히 했다. 권 부회장은 아직 알리지 않은 이사진에게도 사퇴 결심을 전하고 후임자를 추천할 계획이다.
재계에서는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삼성의 대표란 과도한 중압감이 자진 사퇴의 한 가지 이유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권 부회장은 결과를 기약할 수 없는 이 부회장의 2심과 3심 선고 때까지 삼성이란 거대 글로벌 기업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삼성전자에서 이례적으로 대표이사를 5년이나 맡은데다 1952년생으로 6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도 부담스러울 여지가 있다.
삼성반도체 연구원으로 입사한 권 부회장은 2012년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삼성 반도체의 세계 1위 등극을 실현했다. 그가 반도체 사업을 총괄한 이후 실패한 사업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과시했다. 직장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모두 이룬 셈이다. 정점을 찍었을 때 아무런 미련 없이 박수 받고 떠나고 싶은 심정일 수도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그룹 계열사 CEO 중 최고참으로서의 책임감에도 주목한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정체된 삼성의 조직에 변화를 주기 위한 신호탄이란 해석이다. 권 부회장이 물러나면 삼성 그룹의 최고경영진 세대교체가 불가피해진다.
권 부회장의 용퇴 결정으로 가장 다급해진 것은 삼성전자다. 총수 부재로 미래 먹거리 창출 등에 제동이 걸린 상태에서 총수 대행 역할을 한 권 부회장까지 떠나면 경영 공백의 상처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삼성 관계자는 “본인의 결정이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밝혔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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