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재산 4조’ 거대 기업 총수
反이민 주창 트럼프와 닮은꼴
反EU 성향에 첵시트 가능성
지난해 말 한국사회를 뒤덮은 촛불의 물결은 그보다 27년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벨벳 혁명’에 자주 비유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민들이 헌법적 권리와 절차를 통해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는 점 때문이다. 1989년 11월 17일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비폭력 집회는 42일 만에 공산당의 ‘항복 선언’을 받아냈는데, 이를 주도한 바츨라프 하벨(2011년 사망)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체제 변혁이 이뤄졌다면서 ‘벨벳 혁명’을 선언했다. 어느덧 평화적인 시민혁명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된 이 용어, 그리고 여기에 깃든 역사는 93년 분리돼 오늘에 이른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 국민에겐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은 그 당시엔 짐작조차 불가능했던 한국판 벨벳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그 무렵, 이 말의 ‘원산지’인 체코에서도 훗날 정치적 대격변을 초래할 ‘태풍’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해 5월, 체코의 한 재벌 기업인은 ‘긍정당(ANO)’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어 정치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체코어 ‘ANO’는 영어의 예스(yes)에 해당하는 단어다. 부패 척결을 내걸고 6개월 전 설립된 협회 성격의 전신 ‘불만족 시민 행동’의 현지 표기(Akce Nespokojených Občanů) 머리글자를 딴 당명이기도 했다.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 국가인 체코에선 총선 결과가 가장 중요한데 이 때만 해도 신생당 당수인 그가 정계 지각변동을 일으키리라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체코 2위 재벌이자 긍정당 대표인 안드레이 바비스(63) 얘기다.
창당 1년 만에 제2당… 현 지지율은 ‘1위’
이듬해 10월 총선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중도우파 실용주의를 표방한 긍정당이 득표율 18.65%를 기록, 전체 의석 200석 가운데 47석을 차지하며 단숨에 제2당으로 떠오르는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득표율 20.45%, 의석 수 50석’으로 제1당이 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도 큰 차이가 없는 성적표였다. 선거 후 스포트라이트가 바비스에게 쏟아진 것은 당연했고, 창당한 지 1년 5개월뿐인 긍정당은 기성정당인 사민당, 기독민주연합(6.78%, 14석)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새 정부 출범 직후인 2014년 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그는 체코 정치권의 거물이 됐다.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긍정당은 이제 1주일 앞으로 다가온 20, 21일(현지시간) 총선을 통해 제1당으로 올라설 게 확실시된다. 체코 여론조사기관 메디안(Median)이 8월 28일~9월 25일 진행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긍정당은 27.0%를 기록해 사민당(13.5%)과 공산당(12.5%) 등을 크게 앞질렀다. 지난달 4~14일 CVVM의 조사결과(30.9%)에선 아예 30%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최근 1개월 간 모든 여론조사에서 긍정당의 지지율은 2위 정당보다 최소 12%포인트 이상 넉넉하게 앞섰다. 현 집권연정의 내부갈등이 극심하다는 점에서 향후 어떤 파트너와 연정을 꾸리느냐가 관건이긴 하나, 집권 다수당 대표가 될 바비스의 차기 총리 취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체코 총선 소식을 전하는 서방 언론들도 모두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반EUㆍ반이민 내세우는 ‘포퓰리즘’ 성향
바비스는 ‘체코의 트럼프’, ‘프라하의 베를루스코니’로 불린다. 1993년 농산물 가공업체 ‘아그로페트르’를 설립한 그는 비료ㆍ화학, 식품 가공, 에너지, 목재, 건설 등으로 사업 분야를 계속 확장했다. 그 결과 아그로페트르는 자회사 250여곳을 둔 연 매출액 80억유로(한화 10조7,025억원)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고, 직원 3만명을 둔 체코 최대의 민간부문 고용주가 됐다. 2013년에는 체코의 유력 일간지 2개를 발간하는 출판그룹 ‘마프라’도 인수, 미디어 산업에도 손을 뻗쳤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바비스의 개인 자산은 34억달러(3조 8,590억원)에 달한다. 이러한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성공을 주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한 모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와 매우 흡사하다.
정치적 성향도 닮은 구석이 많다. 2004년 5월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된 체코는 아직도 유로화 대신 자국 화폐(코루나화)를 쓰고 있는데, 바비스는 체코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가입’을 드러내 놓고 반대한다. EU의 난민 할당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더 이상의 EU 통합’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총리직에 오르면 체코의 EU 탈퇴, 이른바 ‘첵시트(Czexitㆍ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에서 비롯된 말)’ 움직임이 가시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같은 그의 반(反)EUㆍ반(反)이민 성향은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트럼프가 만약 다른 나라에서 대선에 출마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유럽 국가는 체코”라는 지난달 12일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의 보도는 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바비스와 긍정당에 ‘포퓰리즘’ 꼬리표가 달라붙는 이유다. 달리보르 로학 미국기업연구소 연구원은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바비스가 총리가 될 경우 전례 없는 정치ㆍ경제 권력의 결합으로 오히려 ‘국가’를 주변화할 위험이 있다”며 “이번 선거는 체코의 자유민주주의를 종식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사기죄로 기소… ‘부패 척결’ 부메랑 맞나
문제는 그가 10여년 전 자신의 소유기업인 아그로페트르를 이용, 유럽연합(EU)의 보조금 190만 유로(25억5,143만원)를 편취한 혐의로 최근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해 2012년 세금회피를 위해 5,500만유로(738억 4,135만원) 규모의 면세 채권을 사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물론 바비스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수사”라며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이 선거의 막판 변수가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적다. 해당 의혹들은 이미 지난 5월 불거졌고, 사민당 소속인 보후슬라프 소보트카 현 총리와 루보미르 자오랄렉 대표 등이 계속 물고 늘어지며 맹공을 가했음에도 전세를 뒤집진 못했다. 지난달 초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한 의회 결정 이후에도 50%대인 바비스 개인의 지지율이나 긍정당의 지지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의 관전 포인트는 선거 결과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 다시 말해 체코 사법당국의 수사 및 재판 과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부패 척결’을 외치며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가 불과 5년 만에 차지한 ‘최정상’의 자리에서 도리어 자신의 과거 부패 혐의에 발목을 잡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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