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출신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출간
“정부 전복·권력 주체 등 계획 없어
반란이 아니라 첫 항쟁”
여순사건은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등으로도 불리며 제주4·3사건과 함께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다. 내년이면 여순사건이 발발한 지 70주년을 맞지만 아직까지 사건의 성격과 진실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지금도 말할 수 없고 꺼내기 힘든 상처와 아픔, 여전한 구조적인 사회 인식 때문에 그 누구도 섣불리 진실을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 사건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 등을 비롯한 37개 시·군의 광범위한 지역이 죽음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53)는 “당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면서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은 채 70년간 왜곡된 역사로 방치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펴낸 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도서출판 흐름)를 통해 여순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발발 배경, 사건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증거자료를 제시해 주목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여순사건의 성격을 ‘항쟁’으로 규명한 최초의 연구집이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 ‘반란’과 ‘항쟁’의 목적이나 행위 자체에 대한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추적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이 2차 사료나 구전에 의한 증언을 통해 서술하면서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규정을 미루고 단순히 여순사건이라고 명명해 왔다면 이 책에서는 ‘항쟁’과 ‘반란’을 규명하기 위해 1948년 당시의 가공하지 않은 1차 사료를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항쟁과 반란을 구별하면서 ‘여순항쟁’이라고 규명했다. 이에 대한 증거자료도 충분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 박사는 “반란이 성립되려면 수도 점령이나 정부 전복, 권력자 축출 등의 계획과 새로운 권력 주체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 여수에 주둔했던 제14연대 군인이 주도한 이 사건은 그런 조건들이 하나도 갖춰지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은 철저히 무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의 주체인 당시 14연대 군인에게 ‘동족을 학살하라’는 제주도 출동 명령이 하달됐다”며 “1980년 5월의 대한민국 군인은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출동해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이 자행됐지만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여순사건은 반란과 전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여수 출신의 주철희 박사는 2013년 3월 여순사건에 대한 19가지의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한 저서 ‘불량 국민들’을 발간해 관심을 모았다.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공저 ‘인물로 본 전라도 역사이야기’ 등의 저서와 ‘여순사건 주도인물에 관한 연구’, ‘한국전쟁 전후 반공문화의 형성과 그 의미’ 등 여순사건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여순사건 대신 ‘여순항쟁’으로 부르기를 제안하며 정명(正名)운동을 본격 추진하고 이번 저서를 3권까지 펴낼 계획이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항쟁의 역사지만 피해주민은 그동안 ‘빨갱이 자식’으로 불렸다”며 “이제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후속작업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여수=글·사진 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