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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한국어에 불만 있다

입력
2017.10.12 14:0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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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뮤지션 요조 씨와 함께 독서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일단 녹음이 즐겁고, 배우는 바도 많아 소중한 시간이다. 한글날을 맞아 문장 다듬기에 대한 책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와 ‘동사의 맛’을 쓴 김정선 작가를 초대 손님으로 모셨다(한글날은 한글이라는 문자를 기릴 뿐 아니라 우리의 언어생활 전반을 살피는 날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김 작가는 20년 이상 단행본 교정 교열 업무를 해온 한국어 전문가다. ‘이건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틀렸다’는 꼬장꼬장한 지적을 잔뜩 듣는 거 아닐까 걱정이 좀 됐다. 그런데 김 작가의 철학은 그 반대였다. 국가가 ‘옳은 말’을 정한다는 개념 자체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사람마다 맞춤법이 제각각 다른 세상에 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했단다.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기분이었나 보다.

한글날 기념 방송에서 아름다운 모국어를 찬양하거나 표준어 수호를 맹세하지 않고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한글날은 며칠 지났지만 이야기를 이어 본다. 나, 한국어에 불만 많다. ‘파릇파릇과 푸릇푸릇을 구별하면 뭐하나, 쓸 만한 2인칭 대명사가 없는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극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존댓말-반말 체계에 대해서만 적어보려 한다. 그 얘기만 하기에도 지면이 모자란다.

누군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 사람 나이가 어떻게 되나’를 궁금히 여기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괴롭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때마다 내가 한국어라는 감옥에 단단히 갇혔구나, 탄식한다. 한국어 사용자는 사람을 만날 때 대화에 앞서 상대를 높여야 하는지 낮춰도 되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언어가 그걸 요구한다. 늘 천박한 탐색전을 벌여야 한다.

이 언어를 쓰다 보면 세상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진다. 교실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아무리 배워도 소용없다. 일상의 언어가 ‘실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깨워준다. ‘아랫사람’에게 굴욕감을 주기도 굉장히 쉬운 언어다. ‘갑질’의 핵심이 그거 아닌가.

한국어 사용자들은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그렇게 상대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너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너에게 존댓말밖에 쓰지 못할 때 나는 금방 무력해진다. 순종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런 때 존댓말은 어떤 내용을 제대로 실어 나르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 안에 갇혀 사라진다.

이 언어는 존댓말을 쓰는 사람에게만 복잡한 규칙을 강요한다.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잘못이라고 한다. 사람을 높여야지 왜 사물을 높이냐고. 그러면서 밥, 집, 나이를 진지, 댁, 연세로 높인다. 대화 중에 다른 사람 얘기가 나오면,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상대와 제3자 중에 누가 더 높은지도 얼른 따져야 한다.

나의 자존을 지키지 못하는 언어, 틀렸다고 꾸중 듣기 좋은 말을 자주 쓰고 싶을 리 없다. 단기적인 대책은 상사, 선생님, 윗세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장기적인 대책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한국의 세대 구분이 그렇게 촘촘하고 계층 간 단절이 심한 것, 이 사회가 그토록 출세지향적인 것은 언어 탓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존댓말 쓰고 반말 듣는 상황’을 다들 피하고 싶지 않나. 오래도록 그런 처지에 머물러 억울함이 쌓이고 묵으면 한(恨)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이 언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상호존중 문화를 만들 수 없고, 그 문화가 없으면 시민사회도, 민주주의도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갓 스물 넘은 대학생들이 신입생에게 압존법 따위를 강요하는 풍경에 절망한다. 이 적폐가 끊이지 않고 유전병처럼 후대로 이어질 것 같아 두렵다.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모든 성인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것이다. 점원에게, 후배에게, 부하 직원에게. 언어가 바뀌면 몸가짐도 바뀐다. 사회적 약자는 존댓말을 듣는 동안에는 자기 앞에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방어선이 있다고 느낀다. 그 선을 넘는 폭력의 언어를 공적인 장소에서 몰아내자는 것이다. 고객이 반말을 하는 순간 콜센터 상담사들이 바로 전화를 끊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반말은 가족과 친구끼리, 쌍방향으로 쓰는 언어로 그 영역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직장 후배지만, 정말 가족이나 친구처럼 친한 관계’라면 상대가 나에게 반말을 쓰는 것도 괜찮은지 스스로 물어보자. 상대가 입원했을 때 병원비를 내줄 수 있는지도 따져보자. 그럴 수 없다면 존댓말을 쓰자.

몇 년 전부터 새로 알게 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존댓말을 쓰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상대의 나이는 여전히 살피게 된다. 반말을 쓰던 지인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쓰는 것도 영 쑥스러워 하지 못한다.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감옥의 죄수라서 그렇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해 창살 몇 개 정도는 부러뜨리고 싶다. 다음 세대는 벽을 부수고, 다음다음 세대는 문을 열고…… 그렇게 새 시대를 꿈꾸고 싶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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