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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대왕참나무는 ‘손기정참나무’ 혹은 ‘손참나무’다

입력
2017.10.12 12: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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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는 향기가 있다. 숲향기다. ‘공기가 다르네요!’하는 탄성은 숲향기와 함께 산새 소리와 계곡 물 소리로 욕망에 찌든 저잣거리의 먼지를 털어내는 경계를 넘는다는 신호이다. 꼭 집어 무슨 향기라고 말할 수 없는 숲에 배어 어우러진 합창하는 그 무엇이다. 스스로 향기를 발산하는 나무로 계수나무와 대왕참나무를 꼽는다. 나남수목원에도 여러 곳에 계수나무를 심고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작지 않은 계곡길을 따라 대왕참나무 50여 그루를 키우며 진한 숲향기를 꿈꾼다.

성장과정에서 내게 의미가 있었던 나무들을 찾아 직접 키우고 싶은 수목원을 욕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나무 밑에 묻힐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나무를 통한 나의 스토리텔링의 궤적이 작은 역사가 되어 어쩌면 내가 의도하지 못했던 훨씬 더 큰 숲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대왕참나무의 수해(樹海)를 가슴 뜨겁게 안은 것은 10년 전 미국 보스턴의 MIT대학을 구경하고 나오던 언덕 위에서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바다 같은 가로수길 숲을 마주쳤을 때였다. 아들이 유학하던 코넬대학에 있는 뉴욕대 농대의 수목원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새빨갛게 단풍 드는 복자기 단풍보다 느릿느릿 물드는 대왕참나무의 단풍에서 가을이 가는 시간을 지켜본다. 느슨한 별 모양의 잎도 유별나지만 낙엽이 지기 전 떨어진 까만 껍질에 소중하게 싸인 큰 흑진주 같은 도토리는 그렇게 앙증스럽다.

내가 대왕참나무와 사랑에 빠져들기 전에 이 나무는 서울에 들어온 지 벌써 80년이 지난 것을 알았다. 나무사랑의 눈썰미가 무림의 고수인 언론인 친구의 귀띔 때문이었다. 1936년 8월 베를린의 한여름은 더욱 무더웠을 것이다. 히틀러 총통의 2차 세계대전의 야욕이 올림픽의 깃발 속에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켜보는 영광의 순간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우뚝 선 조선의 건각 손기정 청년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의 사진으로 기록된다.

2시간 넘게 이를 악물며 달려야 하는 자신을 이겨낸 장거리 주자(走者)의 고독도 조국이 없는 안타까움에 비할 바가 없다. 동메달의 남승룡 선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일장기 때문이다. 식민지 청년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극의 절정이다. 히틀러 총통이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축하의 월계관을 씌워준다. 그리고 싱싱한 묘목화분을 부상으로 가슴에 안긴다. 이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자 손기정의 얼굴에 인간승리의 기쁨이 배어났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감동이 뒤늦게 번졌는지도 모른다. ‘동아일보’의 목숨을 건 일장기 사진 말소사건은 며칠 뒤의 일이다. 손기정은 이 화분의 나무를 서울역 뒤 중림동 만리재 언덕에 있는 모교인 양정고 교정에 심었다. 지금도 그 자리 손기정기념관 앞에서 ‘월계관 나무’로 불리며 80년 넘는 거목으로 푸르른 기상을 떨치고 있다. 역사의 행간을 읽는 의미로 ‘서울시 기념물 제5호’의 영광도 안았다.

이 나무가 ‘대왕참나무’라고 불리는 ‘핀오크’(Pin Oak)이다. 1980년 이후에는 이 나무가 미국에서 수입되어 이제는 가로수로도 눈에 띈다. 그러나 ‘핀오크’의 번역으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대왕참나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어쭙잖다. 이제 이 나무를 ‘손기정참나무’ 혹은 ‘손참나무’라고 불러야 한다. 그 역사성의 치열함을 기리고 거목의 품에서 전설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정명법(正名法)이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 다음에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는 악마의 구간인 몬주익 언덕의 고통을 ‘손기정’을 외치며 이겨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월계관을 쓴 그의 기관차 같은 심장박동은 또 하나의 ‘손기정참나무’의 위대한 신화의 부활이었다. 나무는 바로 역사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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