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름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의 정서와 심상(心象)을 반영한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주민동의 없이 마을 이름을 갑자기 바꾸면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우리는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른바 창씨개명)은 잘 알지만, 마을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은 잘 모른다. 지금부터 2회에 걸쳐 일제가 서울의 마을 이름을 어떻게 일본식으로 바꿨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글은 한국이 국제표기에서 왜 ‘일본해’를 ‘동해’로 고쳐줄 것을 요구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일제의 지명개변(地名改變)은 식민지 지배와 짝을 이루어 진행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청일전쟁(1894~95년), 러일전쟁(1904~05년), 한국강점(1910년), 중일전쟁(1937년) 등을 계기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1885년 89명이던 일본인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1944년 16만 명에 이르렀다. 서울 인구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청일전쟁 때 1%, 러일전쟁 때 5%, 한국강점 때 19%, 중일전쟁 때 28% 가량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전체인구 중 일본인 비율이 2~3%였던 점을 감안하면, 일본인의 서울 집중이 매우 격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도성(都城) 안 남산 북쪽 기슭과 도성 밖 용산지역에 많이 거주했다. 일본인은 자신의 거주지역에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조선왕조 말기 도성 안에는 5부(部)ㆍ35방(坊)ㆍ472동(洞)/리(里), 도성 밖에는 8면(面)ㆍ233동/리가 있었다. 동/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주민의 생활터전으로서, 말단 행정구역에 붙는 명칭이었다. 일제는 1911년 4월 1일 서울의 마을 이름을 ○○동ㆍ○○정(町, 마치 또는 초로 읽음)로 통일했다. 이때 확정된 동ㆍ정 총수 819개 중 일본식 마을 이름은 114개였다(14%). 대개 동과 로(路)는 한국인이, 정과 통(通, 도리로 읽음)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일제강점 이전까지 서울의 모든 마을 이름은 당연히 한국식이었다.
1914년 일제는 서울의 관할구역을 8분의 1정도로 축소했다. 이때 한국식 동명은 91개(49%), 일본식 정명은 95개(51%)가 되어, 일본식 마을 이름이 더 많아졌다. 1936년 일제는 서울의 관할구역을 4배 정도로 확장했다. 이때 한국식 마을 이름은 164개(63%)로 늘어난 반면 일본식 마을 이름은 그대로여서 비중이 다시 역전되었다. 그렇지만 말단 행정구역의 모든 명칭을 동에서 정으로 통일했으므로 서울의 마을 이름은 모두 일본식이 된 셈이었다.
서울의 일본식 마을 이름은 대체로 네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A형은 10개 정도인데, 일본 제국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반영한다. 예를 들면 조선총독의 이름을 딴 하세가와초(長谷川町) 등이다. A형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B형은 50여 개로, 일본에서 흔한 지명을 갖다 붙인 경우이다. 일본 도시에는 중심거리라는 뜻을 지닌 혼마치(本町)라는 지명이 많다. 이것을 본떠 진고개 일대에 혼마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벚꽃 명소로 유명한 일본 나라현(奈良縣) 요시노야마(吉野山)에 빗대 남산 서쪽 기슭의 복숭아꽃이 만발한 마을을 요시노초(吉野町)라고 불렀다. C형은 10여 개로, 한국식 지명을 일본인이 부르기 편하게 변용한 것이다. 다동(茶洞)을 차야마치(茶屋町)로 바꾸거나, 구리재(銅峴, 을지로 일대)를 고가네마치(黃金町)로 고쳤다. D형은 40여 개로, 지형, 수목, 건물, 역사 등을 참작하여 작명한 것이다. 남산에서 후암동 일대로 뻗어 내린 세 개의 언덕을 본떠 미사카도리(三坂通)라는 이름을 붙인 경우이다.
일제는 서울의 마을 이름만 일본식으로 바꾼 게 아니다. 일제는 1929년 국제수로기구(IHO)를 통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도록 만들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인명뿐만 아니라 지명이나 바다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해방 이듬해 서울시는 재빨리 마을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쳤다. 그리고 한국관민은 지금 국제표기에서 ‘동해’ 이름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진작 제국주의를 벗어나 평화국가로 변신했다. 일본이 식민주의의 표상인 ‘일본해’ 표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국격(國格)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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