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경제혁신기금ㆍ미소금융 등
대통령 말 한마다에 급조 탄생
#2.
처음엔 명분 앞세워 흥행몰이
금융ㆍ기업 등 반강제적 동원도
정권 바뀌면 줄줄이 흐지부지
#3.
출시 취지 안맞게 자금 쓰이고
모은 돈 대부분은 은행서 낮잠
#. A은행 임원 김모씨는 지난 2년간 매달 5만원씩 자동이체로 납부했던 ‘청년희망펀드’를 최근 해지했다. 2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에서 비롯된 이 펀드는 당시 은행들이 임직원을 대거 동원하면서 초반 세 몰이에 성공했었다. 임원급 이상이 펀드에 가입하면 언론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름까지 공개될 정도였다.
비록 반강제로 가입하긴 했지만 취업준비생 자녀를 둔 김씨는 ‘청년 일자리 창출’이란 취지에 공감해 기부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김씨는 “문재인 정부가 지난 정권 때 만든 정책상품을 키울 거란 확신도 없고, 실제로 그간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 것 같다”며 “내 돈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같아 더는 돈을 못 붓겠다”고 해지 이유를 밝혔다.
역대 정부가 발벗고 나서 만든 정책성 펀드들이 줄줄이 용두사미가 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동원돼 자금을 모은다는 점에서 이른바 ‘관치펀드’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그럴싸한 명분과 초반 흥행몰이에도 불구하고 정권만 바뀌면 슬그머니 사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처럼 사회적 합의 없이 급조돼 반강제적으로 운영되는 한, 앞으로 만들어질 펀드들도 제아무리 취지가 좋다 한들 ‘일회성 관치펀드’의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 청년희망펀드의 누적기부 건수는 13만969건, 누적기부금액은 1,463억1,201만원에 달한다. 이 같은 거액이 모인 데는 대기업의 후원 덕이 컸다. 박 전 대통령이 1호로 가입(2015년 9월 22일) 한 뒤, 불과 74일 만에 1,000억원을 돌파한 기부액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200억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150억원), 구본무 LG 회장(70억원) 등 기업 총수들이 대부분 채웠다. 심지어 최태원 SK그룹 회장(60억원)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70억원)은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정부가 대기업과 은행들의 돈을 ‘준조세’로 여기는 탓에 거리낌없이 이들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일반인이 기부를 위해 계좌를 튼 공익신탁 현황을 보면, 요즘 청년희망펀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기준 청년희망펀드를 위한 공익신탁의 누적기부약정총액(자동이체가 설정된 향후 추가기부 예정금액)은 3억5,549만2,000원이다. 2년 전만 해도 33억원을 넘던 이 금액은 90% 가까이 급감했다. 출범 첫 달(2015년 9월)에만 5만개 넘게 모였던 신규계좌 수는 올 9월 고작 4개가 늘어나는데 그쳤다. B은행의 조모(34) 계장은 “초반엔 은행 고객들에게도 이 펀드 가입을 권유해야 했는데, 반년 정도 지나자 정부에서도 나 몰라라 해 나부터 해지했다”고 귀띔했다.
청년희망펀드는 이렇게 모은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일자리 알선 업무는 청년인재 채용시 기업에게 주는 지원금(최대 300만원), 면접비용 지급, 취업ㆍ자격증ㆍ창업 사이트 정보 제공 등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취업을 위한 특강과 컨설팅, 상담 등 멘토링 서비스도 일반 대학교 취업센터에서 하는 일과 중복된다. 그나마 장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인재육성 프로그램도 실리콘밸리 기업 연수(6개월) 등 단기 해외체험이라 일자리 ‘창출’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사업에 쓰인 돈은 작년 말 기준 80억원이었던 반면, 그 10배(810억원)는 KB국민ㆍ하나ㆍ우리ㆍIBK기업 등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계좌에서 잠자고 있다.
이외에도 정권마다 기업과 은행을 동원해 만든 관치펀드는 숱하다. 박 전 대통령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던 ‘창조경제’와 관련해 지역별로 만들어진 창조경제혁신센터에는 대기업 15곳이 적게는 수백억 원, 많게는 수천억 원씩 출연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서민의 자활ㆍ재기 의지를 높일 목적으로 ‘미소금융’ 사업을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까지는 목표액의 절반인 1조원이 빠르게 모였지만, 정권이 바뀐 뒤로는 모금액이 확 줄었다. 롯데의 출연금은 2010년 150억원에서 2014년 50억원, 2015년과 지난해엔 각각 10억원으로 급감했다.
중소기업을 돕기 위한 동반성장기금(2011년ㆍ7,000억원 목표), 청년창업지원펀드(2012ㆍ5,000억원 목표) 역시 대기업 또는 은행에게 갹출한 돈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활동이 미미한 상태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사회적 합의나 공론화 없이 관 중심으로 급하게 기금을 만들고, 욕 먹지 않을 만큼 보수적으로 운용을 하니 성과가 안 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아름 기자 saram@hankookilbo.com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권재희 기자 luden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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