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진웅(41)이 3년간 피해 다닌 영화가 있다. 주인공 역할인데도 수 차례 거절했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또 얘기가 나올라치면 등을 획 돌려버렸다. 그런데 제작자와 감독의 근성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 결국엔 조진웅을 돌려세웠으니 말이다. 그 영화가 바로 ‘대장 김창수’(19일 개봉)다.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 정말 부담되는 역할이거든요. 제가 불나비도 아니고 어려움이 뻔히 보이는데 그 불구덩이에 어떻게 뛰어들겠어요. ‘사형수’라는 가제까지 마음에 안 들더라니까요(웃음). 급기야 제가 되물었어요. 그렇게 섭외할 배우가 없더냐고.”
1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대장 김창수’ 출연을 결심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골랐다. 김창수는 민족지도자로 존경 받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청년 시절 이름이다. 그러니까 김구를 다룬 영화라는 얘기다. 마음이 무거울 법하다. “나중에는, 내 몫인가 보다, 어찌할 수 없겠구나 싶더군요.”
영화는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죽인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청년 김창수가 인천 감옥소에서 조선 민중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시대적 숙명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린다. 김창수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 주장을 할 수 있도록 동료 죄수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죄수들이 철도 건설 노역에 끌려가 혹사 당하자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요구하며 앞장서 싸운다. 조진웅은 “김구가 아닌, 김창수가 김구가 돼 가는 이야기”라며 “아주 평범하고 천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와 닿았다”고 말했다.
조진웅은 제작자, 감독, 동료 배우 2명과 제주도로 내려갔다. 영화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고, 그러다 지치면 술잔 기울이고, 다시 시나리오를 읽고, 인물을 분석하면서 꼬박 2박 3일을 보냈다. “저라는 사람은 그래요. 안 하면 안 했지, 한다고 했으면 제대로 해야 됩니다. 머리털 끝부터 발톱 끝까지 시나리오를 물고 뜯었어요.”
촬영을 시작한 뒤에도 이런 과정은 계속됐다. 저녁이면 조진웅의 숙소에 모였다. 조진웅은 “종례”라고 불렀다. 뒤풀이로 시작한 자리는 늘 영화와 연기 얘기로 채워졌다. 가벼운 리허설도 하면서 영화에 아이디어도 많이 보탰다. 그때가 지난해 10~11월 즈음이라, 시국도 주요 대화 주제였다. 촬영 도중 여유가 있을 때, 뜻 맞는 배우, 스태프와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조진웅은 “영화의 의미가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창수의 삶은 조진웅에게 스몄다. 그는 “김구의 성정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 저더러 ‘앞으로 거리에 침도 못 뱉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정말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김구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요. 그분 때문에 기본을 지키려 노력하는 한 인간이 생겼잖아요(웃음). 사형을 앞둔 순간에도 결연한 모습을 보며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과거에 인권영화 ‘날아라 펭귄’에 출연한 뒤 술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것도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권에 대해 돌아본 적이 있다는 고백을 보탠 조진웅은 “영화 하면서 많이 배운다”며 “‘대장 김창수’에 출연하길 잘했다”고 뿌듯하게 웃었다.
“흥행이 잘 되든 안 되든, 언젠가 학교에서 김구에 대해 가르칠 때 이 영화를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영화 안에 제가 있다니 기쁩니다. 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저에겐 이 영화가 인생의 중요한 한 순간이 될 것 같네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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