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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억누르기 힘든 정념으로 통속 뒤집어

입력
2017.10.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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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에 오른 소설 10편을 예심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 2편씩 소개합니다. 최근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 김덕희의 ‘급소’, 김사과의 ‘더 나쁜 쪽으로’,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 이유의 ‘커트’,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 정영수의 ‘애호가들’,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 조해진의 ‘빛의 호위’,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입니다.

질기고 힘이 센 통속에 맞서는 기준영의 무기는 휘발성이 강하고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꿈과 정념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만 다시 나타나 삶에 다른 길을 낸다. 창비 제공
질기고 힘이 센 통속에 맞서는 기준영의 무기는 휘발성이 강하고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꿈과 정념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만 다시 나타나 삶에 다른 길을 낸다. 창비 제공

우리는 이런 곤란을 안다. 어떤 경험을 말할 때 그저 하나의 통속극처럼 되어버리는 일. 통속이라는 강력한 틀이 있어서 무엇이든 다 그리로 빨려 들어가 정리된다. 그럴 듯하지만 아닌 이야기. 소설을 요약할 때도 상황은 비슷하다. 결혼을 앞둔 여성의 불안과 상대와의 불화(‘불안과 열망’), 젊은 여성에게 매혹된 중년 남성의 혼란(‘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의부의 죽음과 친모의 가출로 인한 여자아이의 방황(‘4번 게이트’)… 기준영 소설집 ‘이상한 정열’에 실린 9편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줄일 때 틀리다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찝찝함이 따라붙는다. 삶도, 이야기도 통속의 구속력에서 놓여나긴 어려운 걸까?

약혼을 앞두고 호주 브리즈번행 비행기에 오른 수경은 간밤의 꿈들을 차례로 적어본다.(‘불안과 열망’) 그중 한 꿈에서 그녀는 남성용 슈트 차림으로 땅을 파고 있다. 여자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묻는다. “새를 찾는 거죠?” 이 질문으로 수경은 자신이 잃어버린 게 새였는지 되짚어본다. 하지만 땅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날은 급격히 저문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녀는 불쑥 생을 사랑한다고 느끼면서도 삽자루를 쥐고 있던 손바닥의 통증이 떠올라 마음이 도로 가라앉는다.

브리즈번의 거리를 걷던 수경은 수많은 새들의 사진이 걸린 상점을 마주친다. 그녀는 커다랗고 하얀 새의 사진 앞에 서서 그 새가 꿈에 날아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또 언젠가 이렇게 위로 받았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약혼자에게 엽서를 쓴다. “나는 당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족을 모르는 여자야.”

그러니까 인물이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이 중요한 이야기가 되도록 하는 일. 뿌리 없는 정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 결국 그 꿈과 정념이 불러온 의외의 선택을 통해 인물이 다른 시간의 문을 열게 하는 일. 질기고 힘이 센 통속에 맞서는 기준영의 무기는 휘발성이 강하고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꿈과 정념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만 다시 나타나 삶에 다른 길을 낸다.

통속이 다소 편안하고 편리한 수준을 넘어 강도를 더하게 되면 ‘삶은 원래 그러하다, 다들 그렇게 산다, 유별나게 굴지 말고 이대로…’ 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듯하다. 물론 통속을 뒤집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삶을 뒤흔든 경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 따위—또한 통속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쩌면 기준영의 소설이 건네는 것은 빗물에 젖은 영화 티켓 정도일지 모른다. 비 오는 날, 애인과의 다툼 끝에 혼자 남은 나는 홧김에 던져버린 영화 티켓을 한 장만 주워 든다.(‘여행자들’) 상영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고 나는 딱 그만큼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열어둔다. 그로부터 듣는 이야기, 그것이 촉발하는 정념들… 시간이 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갈 테지만 무언가는 살짝 바뀌었을 것이다.

 황예인 문학평론가ㆍ출판사 스위밍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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