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개정 협상 사실상 착수
정부, 13일 국회에 FTA 개정 관련 보고
월풀의 세탁기 세이프가드 청원에
미 ITC “美 산업 피해” 만장일치 판정
중의 사드보복 이어 미의 압박
한국 車ㆍ철강ㆍ가전 수출 초비상
자동차 철강 가전 등 한국의 주요 수출기업들이 추석 연휴 날벼락을 맞았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앞세우며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한국에 대한 고강도 통상압박 조치가 연휴를 틈타 잇따라 발동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허를 찌른 강공이 북핵 위험을 지렛대 삼은 일종의 안보비용 청구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한국 기업들은 사면초가에 놓였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빌미로 올해 초 시작된 중국의 보복무역 충격이 여전한 가운데 미국마저 자국 시장 지키기에 나서면서 한국 기업들은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심각한 시련을 겪게 됐다.
8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5일(현지시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미 가전업체 월풀이 삼성ㆍLG전자를 상대로 낸 세이프가드 청원에 대해 자국 세탁기 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만장일치 판정했다. 앞서 4일에는 우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와 미 무역대표부(USTR)가 미 워싱턴시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2차 특별공동위원회를 열고 FTA 개정협상절차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산업부는 19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릴 세이프가드 발동에 대한 공청회에서 설명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 11일 외교부, 전자업계와 대책회의를 하기로 했으며 13일 예정된 국정감사에서 한미FTA 개정을 위한 보고를 국회에 하기로 했다.
정부 움직임이 급박해진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탓이다. 한미FTA 2차 특별공동위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에게 “내가 너무 미쳐서 당장이라도 손을 뗄 것이라고 한국 측에 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에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 FTA 효과 조사 등 지연 전략을 쓰며 버티던 한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것이다.
한미FTA가 미국의 요구대로 개정되면 당장 한국산 철강ㆍ자동차 업계가 직격탄을 맞게 될 전망이다. 미국은 그간 232억달러(지난해 기준)의 대한국 무역적자 근원으로 이 두 업종을 꼽아왔다. 미국이 관세율을 올리면 국내 자동차ㆍ기계ㆍ철강업에서 앞으로 5년 동안 수출이 170억달러 줄고, 일자리 15만4,000개가 감소한다는 전망(한국경제연구원)이 나올 정도로 업계의 타격은 심각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기에 한국이 포함된 외국산 철강 제품이 미국 안보를 침해하는지를 조사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지난 4월 서명했다. 수입 철강 제품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수준이라고 판단하면 2004년부터 무관세로 수출 중인 한국산 철강에 높은 관세 부과 등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진다.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국산 자동차의 경우 FTA 체결에 따라 2012~2015년 관세율 2.5%를 유지했다가 지난해 무관세가 됐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일본ㆍ유럽산 자동차에 2.5%의 관세가 부과 중인 것을 감안하면, 가격 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경우 전 세계 수출량 중 대미 수출 비중이 35.7%(올해 기준)에 달하는 상황이어서, 관세 재부과 시 점유율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국 측의 압력이 FTA 개정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말로 예정된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첫 시발점이 될 전망이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공정한 부담이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이번 한미FTA 개정협상을 통해 안보 비용과 무역을 연계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편 청와대는 8일 한미FTA 개정 절차를 시작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국내 통상절차법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공식 개정 협상은 법적 절차 완료 이후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밝히며 미 측에 백기 투항을 했다는 비판에 대해 반박했다. 또 ‘한미FTA 개정 협상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도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와 정부는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뒤 이에 따라 개정 협상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얘기해 왔다”고 말했다.
박관규 기자 ace@hankookilbo.com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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