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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복지국가가 다시 이야기되는 이유는

입력
2017.10.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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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간 계약’이 상징하는 임시직 경제체제 팽창

21세기에도 복지국가 설계자 아이디어는 유효

자본세ㆍ기본소득 등 급진적 대안도 수면 위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복지국가의 원조 영국에서 다시금 복지국가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실업에 따른 빈곤 문제 때문이 아니라, 불안정 노동 급증으로 인한 근로 빈곤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80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문제해결이 시대적 과제가 된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시사적이다.

최근 영국 일간 가디언은 ‘어느 때보다 지금, 복지국가가 필요한 이유’라는 기사를 통해 영국의 지난했던 복지국가 건설사(史)를 소개한 뒤 불안정 노동의 급증이 다시 복지국가론의 등장을 가져왔다고 역설했다. ‘베버리지 모델’로 불리는 영국의 복지국가 모델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빈곤 없는 국가가 이상형이다. 실제로 유럽국가 중 영국 실업률은 지난 6월 기준 4.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평균 5.8%은 물론 주요7개국(G7) 평균인 5%보다 낮다. 2011년 8.5%까지 치솟았던 영국 실업률은 ‘일하는 복지’를 강조한 보수당 정권 아래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늘렸다는 보수당 정치인들 주장과는 달리 실업률 통계는 현실의 빈곤 문제를 은폐해, ‘기만적’이라는 게 가디언의 지적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에서 가장 큰 푸드뱅크 사업자인 트루셀 트러스트의 지난 3월 현재 3일치 긴급구호식량 분배량ㅇ느 100만개에 이르고, 가계 부채 비율은 150%로 2009년 금융위기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 부족이라는 게 가디언의 문제 의식이다. 일을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 문제의 핵심은 불안정 노동의 증가, 구체적으로는 ‘0시간 계약(zero-hour contact)’의 성행이 보여주는 ‘임시직 경제(gig economy)’의 과대화다. 기업들이 노동유연화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는 0시간 계약이란 노동이 실제로 제공된 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도록 한 계약으로 우버(택시)나 딜리버루(음식배달)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계약은 주로 외식ㆍ호텔ㆍ배달ㆍ제조업ㆍ마케팅 등에서 활용되고 있는데 영국 내 종사자는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김기선). 사용자가 제공해야할 최소한 근로시간 의무를 없앤 계약으로 기업은 노동법상 부과된 휴업수당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파견이나 용역처럼 중간 매개 회사가 없어 수수료 부담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최고의 인건비 절감 수단인 셈이다.

영국 보수당 정부가 지난 7월 발표한 '타일러 보고서' . 기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저임금 노동종사자에 대한 보호책을 제안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 정부가 지난 7월 발표한 '타일러 보고서' . 기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저임금 노동종사자에 대한 보호책을 제안하고 있다.

기술혁신과 서비스경제의 발달 때문에 이런 고용형태가 불가피하게 확산될 수밖에 없다는 일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노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게 영국 사회의 결론이다. 일례로 노동정책 분야에서 왼쪽 깜빡이를 켠 테리사 메이 정부는 지난 7월 ‘테일러 보고서’를 펴내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정책적 대안의 필요성을 제시한 바 있다. 기술발전이 가져온 효율성과 유연성 혜택을 노동시장 참여자 모두가 공정하게 누리도록 해야한다는 목적의식 하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0시간 근로 계약자가 사용자에게 최소 근로시간 확정해 줄 것을 요청할 권리 보장, ▦법정병가제도 보완, ▦저임금 일자리가 많은 부문의 최저임금제 현실화 및 실질화 등 기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인 새로운 고용형태 종사자들을 보호하는 다양한 정책적 대안을 담고있다(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2017년 9월호’).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의 급증으로 인한 ‘복지국가’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전에 가디언은 베버리지 모델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영국의 복지국가 건설사를 일별한다. 노인빈민과 노동불능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들에게 합법적 구걸 면허증을 주도록 한, 즉 국가가 빈민구제의 법률적 책임을 떠맡은 첫 계기로 평가되는 ‘헨리 구빈법’ 제정(1536년),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 런던의 빈민층이 시민 중 30.7%에 달한다는 충격적 사실을 세상에 알린 찰스 부스의 보고서(1886년), 노동계층 4만5,000명 이상을 직접 조사해 ‘빈곤선(線)’ 과 ‘빈곤의 악순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빈곤연구자 씨봄 라운트리의 작업(1898~1899년) 등이 그 사례다.

빈곤과 실업, 경제위기와 불안한 삶에 지쳐있던 영국인들에게 전생애 소득보장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던 베버리지식 복지국가는 21세기에도 적용가능한 대안일까. 가디언은 절반쯤 회의적이다. 1960~70년대 완전고용이 가능하고, 노동계급이 활발하게 계급이동할 수 있었던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조건이나 상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ㆍ경제적 불안이나 위험을 개인이 혼자 감당하도록 해서는 안되고 불안한 미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복지국가 설계자들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가디언의 주장이다. 근로 빈곤층을 양산하는‘임시직 경제’의 팽창을 볼 때 좀더 급진적 대안으로 피케티가 제시하는 자본세나,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로부터 좌파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전 그리스 재무장관)까지 모두 주장하고 있는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까지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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