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10월 6일 노벨평화상을 시상한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인물이나 단체를 위해 부여하는 상으로, 1901년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상이다. 화학상ㆍ생리의학상ㆍ물리학상ㆍ문학상ㆍ경제학상 등 다른 부문은 모두 스웨덴에서 심사해 시상하지만 평화상만큼은 주창자 알프레드 노벨이 노르웨이에 넘겼다.
노르웨이 의회가 선정한 5인의 노벨위원회는 매년 전세계 각국의 정치인, 전문가, 과거 노벨상 수상자, 노벨위원회 전 소속 위원 등의 추천을 받고 그 가운데 후보를 추려 시상한다. 올해 노벨위원회는 개인 215명과 단체 103개 가운데서 수상자를 선정해야 한다. 후보 명단 자체는 50년간 비공개 처리되지만, 추천자가 후보를 직접 공개하기도 하고 언론의 취재를 통해 알려지는 후보도 있다.
노르웨이 소재 노벨평화상 전문가 집단인 ‘노벨리아나’의 역사학자 아슬리 스벤과 오슬로평화연구소(PRIO)의 헨리크 우르달 소장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노벨평화상 시상 직전 외신 기자들 앞에서 ‘유력 수상자 목록’을 발표했다. 놀랍게도, 올해 두 목록의 선두는 ‘이란 핵 협상’으로 일치했다. 이외에 PRIO와 스벤은 각각 3개와 4개의 후보를 꼽아 발표했는데 이들이 발표한 수상 유력 후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란 핵 협상’: 모하마드 자비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과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
모하마드 자비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과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1(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명 P5+1)과 이란 사이에 체결된 포괄적 공등행동조약(JCPOA), 이른바 ‘이란 핵 협상’을 이란과 서구 양쪽에서 주도한 외교관들이다. 2016년에도 노벨 평화상 수상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이들은 무려 12년에 걸친 협상을 2015년 마무리 지었으며 1979년 이래 철저히 냉각된 미국과 이란 사이의 외교 관계 회복에도 기여했다.
스벤과 PRIO 모두가 이란 핵 협상을 목록의 맨 위로 올린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공화당 정권은 연일 이란 핵협상 때리기에 열중하면서 다자간 협상의 가치를 깎아 내린데다 현재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핵개발 문제를 놓고 ‘극한 대결 구도’로 치닫고 있다.
최근 자리프 장관이 카타르 알자지라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협상을 폐기한다면 우리도 떠날 것”이라고 발언하면서 핵 협상 자체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지만, 지난해 노벨위원회가 콜롬비아 평화협정이 좌초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에게 노벨상을 안긴 것을 감안하면 수상 가능성은 여전히 작지 않다. 스벤은 “자리프와 모게리니가 평화상을 수상한다면 이는 트럼프에게 이란 핵 협상을 준수하고 김정은과도 대화에 나서라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벤은 협상 당상자들 가운데 존 케리 전 미국 국무장관을 후보명단에 올렸지만 PRIO의 명단에는 빠져 있다. 우르달 소장은 “케리 전 장관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이 협상을 성공시킨 대부분의 공은 모게리니 대표와 자리프 장관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필리포 그란디 최고대표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6,500만명이 본거지를 떠났고 이 중 2,200만명은 공식적으로 난민 지위를 획득했으며 1,000만명에겐 조국이 없다. 난민의 수를 집계하고 이들의 처지를 파악하는 일은 UNHCR의 활동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올해도 난민 문제는 세계 정치의 핵심 의제 중 하나였다. 남수단ㆍ아프가니스탄ㆍ시리아 내전과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발호의 피해자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빈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떠났다. 미얀마의 로힝야 난민은 단 4주만에 50만여명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
PRIO는 “이미 1954년과 1981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올해도 유엔난민기구가 유력한 후보로 응당 거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급증하는 반이민 여론과 지원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난민에 냉담해진 서구 국가들, 급작스레 떠오른 미얀마 로힝야 난민 문제 등을 감안하면 난민기구가 다시 노벨평화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터키의 비판 언론 ‘줌후리예트’와 잔 뒨다르 전 편집국장
터키의 일간지 줌후리예트(Cumhuriyet)는 터키 건국 초기에 설립된 세속주의 성향 신문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집권당 정의개발당(AKP)의 비판에 앞장섰다가 정권에 미운 털이 박혔다. 지난해 7월 쿠데타 진압 이후 독재권력 강화에 골몰하고 있는 에르도안 정권에서 집중적인 탄압을 당하고 있다.
터키 경찰은 지난해 10월말부터 아큰 아탈라이 최고경영자(CEO)와 무라트 사분주 편집국장 등을 구금하고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 세력과 쿠르드노동자당(PKK) 등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뒀다. 줌후리예트 직원 17명이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으며 4명은 1년째 구금 상태다. 잔 뒨다르 전 국장은 독일에 도피 중인 지난해 언론인보호위원회(CPJ)의 국제 언론자유상을 수상했고, 줌후리예트는 2015년 국경없는기자회가 시상하는 언론의 자유상을 수상했다.
PRIO는 “줌후리예트와 뒨다르의 수상은 전세계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시민사회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지지가 될 것이고, 세속 민주주의의 성격을 급격히 잃어 가고 있는 에르도안 정권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띨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와 인권운동가 스베틀라나 간누슈키나
또 다른 언론 자유와 독재정권 비판의 의미를 지닌 후보로는 러시아에 극소수 남은 독립언론 중 하나인 노바야 가제타가 꼽힌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 러시아 언론은 사실상 국영언론이 독점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 가운데서 노바야 가제타의 기자들은 정부 비판적인 기사를 쓰다가 암살당하거나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2016년 푸틴 대통령 등 세계 지도자들의 역외탈세 연루를 드러낸 기밀문건 ‘파나마 페이퍼스’도 보도한 바 있다.
다른 러시아 후보인 인권운동가 스베틀라나 간누슈키나는 본래 수학자이나 1990년 비정부기구 ‘시민지원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조력했다. 시민지원위원회는 러시아 내 탈북자를 포함한 이민자와 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단체로 이민자의 법률적 조력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간누슈키나는 한때 러시아의 시민사회ㆍ인권 대통령 자문위원회 소속이기도 했지만 푸틴 정권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아 시민지원위원회가 2015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외단체’로 규정되는 등 불편한 관계가 됐다.
에르나 솔베르그 현 노르웨이 총리는 2012년 간누슈키나를 평화상 후보로 공개 추천했다. PRIO는 지난해 간누슈키나를 가장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로 꼽았고 스벤도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했다. 스벤은 “간누슈키나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러시아와의 외교 마찰을 되도록 피하려는 노르웨이 정부는 곤란해지겠지만 노벨위원회의 독립성은 증명되는 셈”이라고 평했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2017년은 현실적으로 국제사회 관심의 변방에 서 있던 아프리카 국가의 모임 ECOWAS가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 해였다. 올해 1월 감비아의 독재자 야흐야 자메 대통령이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퇴진을 거부하자 ECOWAS 소속 세네갈ㆍ나이지리아ㆍ가나ㆍ말리ㆍ토고 5개국은 군 병력을 배치하고 대선에 승리한 야권 지도자 아다마 바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면 군사 개입을 하겠다며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자메는 적도 기니로 쫓겨나고 바로우는 2월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ECOWAS의 평화 유지 활동은 1990년 라이베리아에 ECOWAS 모니터링그룹(ECOMOG)이라 불리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97년 시에라리온, 1999년 기니비사우 내전에 부대를 파견하고 2003년에는 2차 라이베리아 내전에도 개입한 바 있었다. ‘감비아 모델’이 성공하자 아프리카연합(AU)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부룬디, 남수단, 짐바브웨 등지에 개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일었다.
시리아 시민방위군 ‘하얀 헬멧’과 라이드 알살레 대표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전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6년째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시민방위군 일명 ‘하얀 헬멧’의 활동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아 왔다. 이들은 전장에서 사망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구출하며 이재민들을 전장 밖으로 탈출시키는 활동을 진행해 왔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양측의 잔혹한 폭력에 모두 반대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기도 하다. 대표자 라이드 알살레가 33세인 것을 비롯해 구성원 대부분이 청년 시민이다.
하얀 헬멧은 지난해에도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였을 뿐 아니라 유료 동영상업체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 주인공으로서 아카데미상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수상했다. 올해 한국에서도 만해대상 평화부문 2017년 수상자로 선정돼 살레 대표가 내한한 바 있다. 지난해 하얀 헬멧에 대한 서구의 관심이 집중되자 시리아 정부 측에서는 아사드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궁극적으로는 축출하기 위해 서구가 조작한 단체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양심수 라이프 바다위
사우디아라비아의 블로거이자 시민운동가인 라이프 바다위는 ‘프리 사우디 리버럴즈(Free Saudi Liberals)’라는 공개 토론 웹사이트를 만들고 사우디 내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가 정보기술법 위반 이슬람교 모독 혐의로 징역 10년, 공개 태형(채찍질형) 1,000회를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태형은 한 차례 50회를 집행한 후 집행되지 않고 있으나, 공개 태형 집행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세계에서 그를 석방하라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부인 엔사프 하이다르는 캐나다로 망명했으며 바다위가 더 이상의 채찍형을 받으면 사망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197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시민단체 국제앰네스티가 그의 대표적인 후원자다. 바다위의 수상은 사우디의 후티 반군 탄압으로 인해 장기화된 예멘 내전의 피해 상황을 환기하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성폭행 여성 돕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드니 무퀘게 박사
산부인과 의사인 드니 무퀘게 박사는 1998년 내전에 시달리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 부카부에 ‘판지 병원’을 설립, 반군에 의해 납치돼 집단 성폭행을 당한 피해 여성을 돕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집단성폭행으로 인한 내상 치료에 세계 최고 권위자다. 2014년 유럽의회가 제정한 인권상 사하로프상, 2015년 하버드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2016년 한국의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래 꾸준히 노벨 평화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2012년 유엔 연설에서는 집단 성폭행 범죄를 규탄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전쟁 전술로 활용하는 부정의한 전쟁을 막기 위해 전세계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외 거론되는 후보는…
이들 외에 서구 언론에서 거론하는 유력 후보로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과 ‘성역도시 철폐’ 등에 맞서 인권 수호를 위해 법률투쟁을 벌여온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있다. 또 홍콩 ‘우산혁명’의 상징적 수장으로 최근 홍콩 법원의 판결로 수감된 조슈아 웡 데모시스토당 당서기, IS에 납치돼 성폭행을 당한 후 탈출해 끔찍한 경험을 증언하고 유엔의 인신매매 생존자 존엄에 대한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야지디족 인권운동가 나디아 무라드도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포용적 난민정책을 펼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이를 지지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평화상 단골 유력 후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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