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추수감사절과 혼동해 풍성한 음식 집착”
“올벼 수확 안 됐던 일부 지역 추석 안 지냈다”
“일년 중 가장 하늘이 높고 아름답고 휘영청 달이 밝은 날, 평소 닫았던 북문까지 열어 젖혀 놀고 즐기고 축제를 벌이는 게 추석이잖아요. 유교 국가도 아닌데 조선시대 차례 음식을 하느라, 특히 여성들만 고생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풍경이죠.”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추석 명절의 원래 취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농경 사회에서 밤이 도깨비의 시간, 귀신의 시간이었다면 하늘이 높고 맑고 보름달이 뜬 추석은 밤에도 대낮처럼 길이 밝은 몇 안 되는 날 아니냐”며 “밤에는 돌아다닐 수도 없고, 문 밖에는 출입도 못했던 여성들을 오히려 해방하는 날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언제부터인가 추석은 하루 종일 전을 부치며 맡는 기름 냄새, 상 다리가 휘어지는 차례상, 해도 해도 화수분처럼 늘어나는 설거지 등의 풍경으로 기억되지만, 정작 전문가들은 이는 추수를 앞두고 성큼 다가온 가을 밤을 즐기던 원래 추석의 연원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추석 명절은 본래 차례를 위한 노동의 주간이 아니라 추수를 예비하고 청량한 가을 날을 즐기기 위한 휴식과 놀이의 주간이라는 것이다.
추석은 추수감사절인가
추석에 마땅히 풍요로운 음식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은 이 날을 한국식 ‘추수감사절’로 여기는 정서와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적잖은 전문가들은 ‘추석=추수감사절’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황교익씨는 “추석에 추수감사절 성격이 있다고 보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북쪽에서 온 민족이라 과거에는 음력 8월쯤 추수를 했다’는 것”이라며 “반대로 북방의 한 풍습을 문화로 흡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이어 “부여 등 우리 고대 부족국가 풍습을 보면 추석엔 놀이를 즐기고, 추수감사절 성격의 행사는 10월 상달고사 등이 따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실제 우리 땅에서 음력 8월 보름에 수확할 수 있는 햇곡식, 과일은 오늘날의 차례상에 주로 오르는 것들과는 차이가 있다”며 “사과와 배만 해도 정부에서 매년 ‘추석 출하 및 물가 자료’ 등을 발표하면서 ‘꼭 이런걸 차례상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강제해서 그렇지 제철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의 견해도 비슷하다. 민속학계 원로인 김명자 안동대 명예교수는 “추석은 수확의 준비 기간이자 그 동안 농사를 잘 하게 된 것에 기뻐하는 농공감사일(農功感謝日)로 풍요를 예축했던 명절”이라며 “쌀 중에서도 이른 쌀 즉 ‘올벼’만이 일부 수확돼 이 쌀로 빚은 송편을 ‘오려송편’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올벼는 일찍 수확 가능한 벼로, 이 첫 나락을 베어 조상께 올리는 일은 ‘올베심리’라고 했다. 김 교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편찬한 ‘한국세시풍속사전’의 집필자다.
‘한국세시풍속사전’은 추석(秋夕)을 글자 그대로 ‘가을 저녁’, 나아가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고 정의한다. 중국에서는 추석 무렵을 중추(中秋), 월석(月夕) 등으로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중엽 이후 중추나 월석을 축약해 추석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풍속사전에 따르면 추석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문헌자료는 없지만 “8월 15일 왕이 풍류를 베풀고 활을 잘 쏜 자에게 상을 준다”(당나라 역사서 수서 동이전 신라조) “8월 보름날이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이 모여 활을 쏜다”(송나라 역사서 구당서 동이전 신라조)는 기록이 있다.
김명자 교수는 “요즘은 농업 기술이 발달했지만 경북 북부 등 일부 지역에선 추석 무렵이 아예 올벼도 나오기 전”이라며 “가령 예천, 안동 등의 고령층에서는 어릴 때 추석 명절을 지낸 기억이 전혀 없다는 분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사회에 들어선 뒤 도시 노동자들에게 각별할 수 밖에 없는 ‘공식 휴일’로 지정되면서야 전국적인 추석 차례 문화가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길 밝히는 달빛 함께 즐기는 날
추수를 끝낸 뒤 치르는 서양의 추수감사절과 우리 추석을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보니, 심지어 몇 해 전에는 “본격 수확 전이라 농산물이 비싸고 차례상 차림이 부담되니 추석을 늦추자”는 주장도 나왔다. 2013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열었던 '쉬는 날 개선 방안 세미나'에서도 추석을 늦춰 양력으로 하자는 방안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당시 세미나에 참석했던 김명자 교수는 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우리의 명절이라는 것 자체가 생활과 계절의 마디로 쉬어가는 시점이고 특히 정월 대보름은 농사를 앞둔 농한기, 추석은 추수를 앞둔 농한기였다”며 “꼭 어떤 상을 차려야 하는지에 맞춰 날짜까지 바꾸는 건 어색하다”고 했다. 굳이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날을 찾는다면 우리에겐 음력 10월 상달고사, 천신제, 가을고사가 있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산업사회 이후로는 가족들이 바쁘게 일하며 뿔뿔이 헤어져 지내니까, 공식 휴일로 지정된 추석 즈음에나 얼굴을 보잖아요. 그래서 추석이 더 각별해진 것 같아요. 그러니 차례상이든 뭐든 너무 예전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큰 의미가 없죠. 미국식 추수감사절에 끼워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명절이라는 쉬어가는 마디에서 나름의 정성으로 차례를 지내거나, 각자의 방법으로 쉬며 즐기며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게 본래 취지에 맞지 않을까 싶어요.”
추수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쉬고 즐겨야 할 시점에 미리 ‘요란한 차례상’을 차려 대는 현재의 추석 문화가 ‘부엌노동자’들만을 힘겹게 하는 것은 아니다. 황교익씨는 이런 문화가 사과, 배 등 과수의 조기 출하를 부추기고, 장기적으로 농촌에도 손해를 입힌다고 본다.
“우리 배는 저장성이 좋은 신고배가 대부분인데 이 무렵이면 아직 신고가 많이 안 익죠. 어떤 것은 익은 것처럼 보이려고 지베렐린(생장촉진제) 처리도 해요. 세포를 뻥튀기 해서 크게 만드는 거죠. 그러니 사실 맛 없는 경우도 많아요. 사과도 반사판을 달아 빨갛게 익은 것처럼 색만 붉히기도 해요. 제수용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죠.”
소비자들이 제수용으로 급히 익힌 과일만 접하다 보면 맛이 없다는 인식을 가져 평소에는 이들 과일을 덜 사게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전체 농가를 위해서도 정부에서 꼭 추석을 앞두고 어떤 특정한 농산품만을 사야 한다고 은연 중에 권장하는 추석 품목 물가 자료를 내선 안 된다”며 “국가가 불교식 상차림 법을 발표하는 일은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황교익씨가 생각하는 추석의 본질은 “달빛 축제”다. “사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유교 문화를 그대로 배운 세대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공부나 여유도 없었죠. 하지만 이제 그런 관습들을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조선에서 어떻게 했건 도대체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제 민주공화정 시민답게 살아야죠. 달빛도 즐기고 모두가 신나게 쉴 수 있는 명절이 됐으면 해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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