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만으로 압도되는 경우가 있다. 뛰어난 무언가에 기가 눌려 꼼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자극적인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길만 묵묵히 걸어간다. 영화 ‘남한산성’은 절제의 미를 살렸으나 빈틈이 없으며 묵직하다.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두고 치열한 생존을 펼친 47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후반 병사들이 펼치는 북문전투 신 등에도 신경 썼으나 문신인 최명길(이병헌 분)과 김상헌(김윤석 분)이 대립하는 모습에 가장 초점을 맞췄다. 이병헌과 김윤석은 무릎을 꿇어 앉아 대사를 치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영화답게 만든다. 두 배우는 연기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존재감은 공간의 기운을 감싸며 영화 전체를 압도한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건 ‘살아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죽어서 살 것인가’다. 즉 수치스럽지만 목숨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대의를 다 하고 목숨을 버릴 것이냐의 문제다. 최명길은 만고의 역적으로 길이 남을 운명을 자처하고, 김상헌은 지금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움의 긴장감은 양측의 실력이 팽팽할 때 더욱 높아진다. 서로 완벽한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가고 영화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말싸움은 장대한 기골을 가진 장수들의 칼싸움을 보는 것보다 더 격렬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적이 아니다. 의견은 다르지만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진심을 존중한다. 이 가운데 인조(박해일 분)는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이듯 인조는 청나라 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치욕을 연기하는 박해일은 마치 입안이 가득 헌 상태에서 소금을 꾸역꾸역 먹는 것 같은 고통을 표현한다.
고통이 가득한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색깔은 흰색과 빨간색이다. 설원은 펼쳐져 있고 대신들의 콧수염에는 눈발이 허옇게 엉겨있다, 어린 백성들의 볼은 까칠하게 터있고, 짐승들은 가죽이 벗겨진 채 뻘겋게 피가 맺혀 있다. 관객들은 피 맛이 날것만 같은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날것의 이미지는 음악감독인 류이치 사카모토의 선율에 맞닿아 더욱 강렬한 색을 낸다. ‘마지막 황제’ ‘레버넌트’ 등을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황동혁 감독의 말대로 해당 작품의 음악감독이었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번에도 제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남한산성’을 기존 사극과 다른 깊이를 만들어냈다.
‘남한산성’은 한마디로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치고 박고 싸우는 역사영화에 익숙하다면 이와 같은 분위기는 낯설지 모른다. 극적인 반전에서 카타르시스를 얻길 기대하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으나 ‘남한산성’은 그 반전이 없다는 점이 카타르시스를 준다. 많은 논쟁들이 펼쳐지고 많은 사람이 죽고 다 무너진 다음에야 드디어 살게 된다는 허무함은 오히려 눈물을 나게 만든다.
병자호란은 모두가 아는 역사이자 치욕적인 이야기다. 지금에 와서 달라질 것이 없는 이 이야기를 ‘남한산성’을 통해 되돌아보는 이유는 380년 전 명나라냐 청나라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던 조선의 모습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황동혁 감독은 “어쩌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가 처한 운명 같기도 하다”라며 현재의 우리에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3일 개봉.
이주희 기자 lee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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