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법상 독립법인으로 인정되면
모그룹 일감 받아도 규제 안 해
기술ㆍ노하우 없이 시장질서 왜곡
‘친족분리 회사와 거래내역 공시’
공정거래법 개정안 국회서 계류
“한층 엄격한 사후감시 잣대 필요”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지배하는 유수홀딩스(당시 한진해운홀딩스)와 싸이버로지텍 등 7개사는 지난 2015년 5월 한진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최 전 회장이 경영권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기고 한진해운 보유 지분을 3% 미만으로 줄이며 한진그룹 일가와 ‘남남’이 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2007년부터 7년간 한진해운을 이끌어온 최 전 회장은 한진해운 부실의 법적 책임에서 벗어났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도 합법적으로 회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분리 후에도 유수홀딩스는 한진해운 사옥 관리로 임대료 수익을 거두고 싸이버로지텍은 한진해운의 물류 정보시스템 관리업무를 맡는 등 한진그룹에서 계속 일감을 받았다.
최 전 회장의 사례처럼 이른바 ‘친족분리’가 일감 몰아주기 제재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할 관련 법안은 1년째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다. 2일 국회 등에 따르면, 자산총액 50조원을 초과 대기업 집단은 친족분리된 회사와의 거래 내역까지 공시하도록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지난해 8월 발의(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된 후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속 계류 중이다. 국회 관계자는 “이달 상임위 논의 대상 법안에서는 빠진 상태인데 10, 11월에 논의될 지도 미지수”라고 전했다. 채이배 의원실 관계자는 “올 2월 정기국회에서 관련 논의가 일부 있었지만 당시 정부와 여당(새누리당)이 ‘무조건 반대’ 입장을 보여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친족분리란 대기업 집단 총수(동일인)의 6촌 이내 친족(인척은 4촌 이내)이 운영하는 계열사(친족기업)가 집단에서 분리(독립경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거래법은 ▦모(母)그룹과 분리대상 친족기업의 상호보유 지분이 3% 미만이고 ▦임원겸임ㆍ채무보증ㆍ상호대차가 없는 경우 친족분리를 허용하고 있다. 현재 대기업집단 내 총수일가 지분이 30% 이상(상장사)인 계열사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는다. 내부거래 규모가 연간 200억원을 넘거나, 연 매출액의 12% 이상이면 해당 총수일가는 처벌된다.
하지만 친족분리에 따라 계열사가 아닌 독립법인으로 인정되면, 옛 모그룹에서 일감을 받아도 제재 대상이 되지 않는 점을 최근 상당수 재벌 친족들이 악용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채 의원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친족기업 일감 몰아주기 의심사례’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누나인 이순희씨가 주요 주주로 있는 스마트폰 액세서리 제조업체 알머스(구 영보엔지니어링)는 지난 2005년 삼성에서 독립한 후 매출의 90%를 삼성전자와의 거래에서 올리고 있다.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조카인 장재영(신영자 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아들)씨가 100% 주식을 보유한 비엔에프통상은 2011년 친족분리 후에도 롯데백화점과 롯데면세점에 명품 브랜드를 납품하며 2015년 매출 438억원을 기록했다. 채 의원은 “친족기업이 별 다른 기술ㆍ노하우 없이 일감을 따내며 시장 질서를 왜곡하고 소비자 후생까지 떨어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 6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 같은 지적에 “친족기업이 사실상 내부거래를 하며 일감 몰아주기의 효과가 생긴다는 지적에 동의한다”고 답했지만 공정위는 아직 친족간 일감 몰아주기 제재에 상당히 소극적이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논의되면 그 때 입장을 밝힐 것”이라며 “지금 공정위 자체적으로 관련 제도를 정비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현재 학계 등에선 친족간 일감 몰아주기 제재의 필요성과 구체적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대기업집단과 계열 분리된 친족기업간 거래 내역을 공시하거나 ▦1999년 공정거래법 개정 때 친족분리 요건에서 삭제된 ‘거래의존도’(최근 1년간 매출입 상호의존도 50% 미만) 조항을 부활시키는 방안 등이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계열 분리된 친족기업에는 한층 엄격한 사후감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며 “다만 친족분리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은 불필요한 사전규제가 될 가능성이 있어 반대한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공시 강화와 더불어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제재 대상(총수일가)에 계열 분리된 친족기업을 추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