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 정부는 논란을 빚던 800만달러(약 91억원) 규모의 대북 인도적 지원 방침을 최종 결정했다. 탁아시설과 소아병동 건축, 임산부 대상 영양강화 식품과 영양실조 치료제 제공 같은 인도적 지원이 논란이 되는 것은 대상이 북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과 핵이라는 이슈에 함몰돼 정부 결정을 판단하기에 앞서 인도적 지원에 관한 국제 기준과 사례들을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제적 정의와 기준을 보자. 인도적 지원이란 인간이 만든 위기와 천재지변 상황이나 그 사후에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경감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그런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약은 인도적 지원의 3가지 원칙으로 인류애(Humanity)와 공평(Impartiality), 중립(Neutrality)을 제시한다.
임시적 수동성(temporary response)도 중요한 기준이다. ‘위기나 재난, 그 이후’가 아닌데도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인도적 지원은 극히 드물다. 인도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지원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과 모니터링을 허용하는 것은 지원을 받는 나라의 의무다(제네바 협약 23조).
이제 이 기준을 이번 결정에 적용해 보자. 우선 대상이 북한이어서 인도적 지원을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제네바 협약의 원칙에 어긋난다. 인도적 지원은 사상적ㆍ정치적 고려를 엄격히 배제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에 의거해 결정ㆍ집행돼야 한다. 국제 기준으로 판단할 때 북한의 아동 및 여성 보건 현실이 인도적 지원이 필요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은 정부의 지원 승인 논리에도 동시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 북한에서 그 동안 존재하지 않던 ‘위기나 재난 상황’이 발생했다고 봐야 하는가. 인도적 지원을 받는 나라인 북한이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과 모니터링을 허용할 것이라는 보장은 있는가. 대북 지원이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인도적 지원이 되기에는 중요한 필요조건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인도적 지원을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는 게 분쟁 지역의 특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지원과 교류가 이뤄져야 하는 것은 이를 통해 분쟁 지역의 갈등과 긴장이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원이 그 사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3년 오슬로 평화협약 이후에도 20년 넘게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져온 땅이다. 군사적ㆍ경제적으로 우위인 이스라엘은 2004년 이후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는 거대한 분리 장벽을 세웠다. 길이가 700㎞가 넘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스스로 치료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이 장벽 너머로 불러들여 치료해주고 있다. 무슬림 최대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 기간에는 수 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성지 순례와 쇼핑을 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방문을 허용한다. 물론 예뻐서가 아니다. 이런 정책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규모 폭력 사태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원을 통해 갈등과 분쟁을 줄이고 테러리즘을 막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설득력과 타당성이 충분하다. 국제적 경험에서 증명된다. 하지만 이번 인도적 지원을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기에는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부족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실효성이다. 의도가 얼마나 실제 효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국민 세금으로 제공하는 인도적(人道的) 지원이 ‘퍼주기 시즌 2’가 아니라 일촉즉발의 한반도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북한을 대화와 개방의 길로 이끄는 인도적(引導的) 지원이 되려면 국제적 경험과 사례들을 참고한 보다 정교한 계획과 실천이 필요하다.
조정훈 아주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아주통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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