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시인의 시집에서 ‘보문동’이란 제목의 시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서울 보문동에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였다.
햇빛이 너무 좋아서
그 곁에서 깜박 졸고 일어났을 뿐인데
백발이 되었다.
나의 살던 보문동 집은 유난히도 양지바른 집이었다. 1960년대 초반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충신동에서 보문동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 사대문 안이었지만 20평도 안 되는 비좁은 한옥에서, 사대문 밖이지만 56평의 한옥은 대궐과 같았다. 이사올 당시 동네이름도 신설동이었다. 동대문 밖에 새로 생긴 동네였다. 널찍한 돌계단을 오르면 큰 대문 양쪽으로는 쪽문이 있었고 그 쪽문은 비밀스런 별채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무거운 나무의 삐꺼덕 소리를 내며 대문을 들어서면 꽤 넓은 대문간이 있었고 대문간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화강암의 댓돌을 딛고 마루로 올라 갔다. 정남향의 마루는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더 깊이 볕이 들어 왔다.
대청마루에 누우면 춘양목으로 지었다는 대들보가 참으로 듬직했다. 그 마루에는 아버지가 딸들을 위해 사주었던 ‘아리아’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한 피아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다른 집에는 없었던 특이한 일본식 욕조가 있었다. 불을 때서 목욕물을 데우는 가마솥과 같은 둥근 욕조였는데 나무 발판을 몸무게로 누르고 욕조에 들어가야만 뜨거운 가마에 데는 것을 막아 주었다. 자매들이 둘씩 들어가 목욕을 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안방에는 대문이나 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호지문이 있었고 방마다 툇마루가 있어 그 마루에 앉으면 늘 숨고르기가 되었다. 안방에는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이 있었는데 마루를 통하지 않고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끈한 음식을 나를 수 있었다.
그 마당에는 언제나 햇빛이 가득했고 팬지, 글라디올러스, 장미, 과꽃, 봉숭아. 유도화, 포도나무를 심었다. 늦여름 붉은 샐비어가 가득 피어 그 꽃의 미미한 꿀물을 빨아먹는 것이 큰 재미였다.
한옥의 방은 창호지문을 닫으면 의외로 안온하고 비밀의 공간이 되었다.
우리들 공부방에는 동네 목수한테 부탁하여 붙박이 책장과 책상을 짜주었다. 그 당시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그 책장에 정음사와 동화출판사의 빨간색 표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아 주었다. 그 책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다 보면 엄마처럼 될 수 있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머니의 첫 소설 ‘나목’이 나오던 때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칼 끝이 지나가듯이 강렬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후벼 파듯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던가. 밥을 먹지 못하고 엄마의 첫 책을 읽는 딸의 방 앞에 잠시 서성이던 엄마의 모습이 꿈속만 같다.
어머니는 안방에서 글을 쓰셨다. 아버지 곁에서 때로는 엎드려서, 때로는 작은 소반 위에서. 안방에는 책상도 없었고 책꽂이도 없었다. 어머니는 글을 쓰다가 가끔 사전이나 책을 찾으러 우리 방에 왔다. 내 방에 들어와서 뭔가를 확인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얼마나 좋았던가.
보문동 방에서 풀었던 미적분과 끝까지 읽었던 ‘안나 카레리나’ ‘죄와 벌’ ‘분노의 포도’ 등은 나의 자존심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팝송을 들으며 공부하던 나만의 시간은 진정 순수한 행복이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그 이후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해 보지 않았고 그 때와 같은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300원에 샀던 해적판 ‘퀸’의 레코드판을 들으며 느꼈던 그 자유로움을 잊을 수 없다. 그건 어머니는 모르는 세계였다.
학교 가는 길에 엄마의 원고 심부름을 했다. 광화문 근처 신문사나 문학잡지사에 갖다 주려 책가방 속에 조심스레 원고를 넣어 가는 그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거룩하였던가. 그 원고를 미리 꺼내 읽지는 않았다. 나의 임무는 오직 충실한 배달부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원고에 대한 경외감, 비밀문서와 같은 떨리는 은밀함이 있었다. 그때는 검열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어머니는 용감하고 아슬아슬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였으니까.
어머니는 거기서 매일 아침 여러 아이의 도시락을 싸셨고, 매년 100포기가 넘는 김장을 하였고, 다섯 개가 넘는 방의 연탄불을 번갈아 갈았다. 그리고 망령이 점점 심해지는 할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점점 작아져 가는 할머니의 쪽진 머리에서 스르르 흘러내리던 은비녀가 기억난다.
어머니는 보문동 집에서 ‘나목’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조그만 체험기’ ‘엄마의 말뚝’을 쓰셨다.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았을 때 보문동 집에서 친정어머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였다. 할머니의 건넌방이었다. 분명 나를 낳아 기른 해산바가지에 쌀을 씻고 미역을 씻으셨으리라. 그리고 그 이듬해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보문동 한옥은 기억 속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 집에서는 좋은 일만 있었지. 그 때는 행복했었지.” 보문동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이 지금도 어머니의 서재에 걸려 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그 사진이 어머니의 영정사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기억을 더듬으며 보문동 집을 그린다. 나를 키웠던 그 공간과 시간을 그려본다.
호원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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