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윤석(49)이 ‘나무 끝에 부는 삭풍’이라면, 배우 이병헌(47)은 ‘눈 속에 찬 명월’이다. 바람이 할퀴어 달빛은 차갑게 얼어붙고, 달빛이 어둠을 몰아내 바람은 숨을 곳이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기대고 부딪히고 엇갈리면서, 묵향 그윽한 수묵화 한 폭을 완성한다. 영화 ‘남한산성’(10월 3일 개봉)은 두 사람이 붓이 되고 먹이 되어 그린 그림이다.
유난히 눈발이 거셌던 1636년 병자년 겨울, 청나라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몸을 숨긴 인조(박해일)와 신하들의 47일간 이야기다. 청과 화친해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끝까지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이 신념으로 다툰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 최명길의 말은 화살처럼 조용히 날아와 급소를 꿰뚫고, 김상헌의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선혈을 흩뿌린다.
말(言)의 전투를 벌이는 이병헌과 김윤석의 명연기가 경이로워 숨이 막힌다. 원작자 김훈 작가도 말했다. “내 문장이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삶과 피와 영혼을 보여 주는 기쁨을 느꼈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카페에서 각각 마주한 이병헌과 김윤석의 이야기를 함께 담았다.
최명길 역 이병헌
액션보다 날카로운 말의 힘 보여줘
‘누가 옳았나’ 알 수 없는게 최대 매력
김윤석은 그야말로 뜨거운 배우
-최명길과 김상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둘 사이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맞춰져 있다. 캐릭터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고심했을 것 같다.
김윤석(김)=“나는 처음부터 김상헌이었다. 이병헌씨는 최명길이었고. 그래서 배역을 놓고 신경전 벌일 일도 전혀 없었다. 그의 논리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만약 국경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다면 화친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집 안방까지 쳐들어온 적은 용서할 수 없다. 물렁물렁하게 대처하면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다. 다시는 만만하게 보지 못하도록 작살을 내줘야지(웃음).”
이병헌(이)=“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서로 소신이 다른 두 사람의 논리에 번갈아 설득당했다. 나중엔 내가 누구 편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더라. 두 사람의 대립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다만 최명길에게 마음이 더 쏠린 이유는 ‘우리 백성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적장 칸(김법래)에게 말하는 대사 때문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극중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다가 상대에게 설득되는 순간은 없었나.
김=“김상헌과 최명길은 결국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백성과 왕을 위한 길. 다만 마지막 행동 하나만 다를 뿐이다. ‘당신 말이 맞아, 그래서 내 말대로 해야 해’라고 서로 주장하는 거다. 김상헌을 연기하는 내 입장에서 보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추구하는 광해를 폐위시킨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최명길이 다시 명을 버리고 청과 손을 잡자고 하니, 인정할 수 없는 거지. 그럴 거면 뭐 하러 광해를 폐위시켰나(웃음).”
이=“내가 왕이라면 누구의 손을 잡았을까, 누가 옳은 판단이었을까,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다. 그런데 그게 또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두 사람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목에 핏줄 세우며 싸우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잃지 않는다. 최명길이 왕에게 청하지 않나. 전쟁이 끝나 환궁할 때 꼭 김상헌을 챙기라고, 그는 유일한 충신이라고. 김상헌 역을 맡았더라도 기분 좋게 연기했을 것 같다.”
-이병헌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1,200만 흥행을 경험했고, 김윤석은 뜻밖에도 사극 출연이 처음이다.
이=“광해를 연기했던 내가 이번엔 광해를 내쫓은 최명길을 연기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웃음). 그러나 새로운 상황과 인물로 접근했지, 광해를 의식하진 않았다. 사극이라고 해서 연기 방법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최명길에겐 액션보다 날카로운 말이 있고, 멜로보다 진한 나라 사랑이 있다.”
김=“언젠가 사극을 한다면 묵직한 정통사극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잘 만났다. 셰익스피어 극이나 그리스 비극처럼 클래식한 느낌을 받았다. 감정을 객관화하고 이성과 논리로서 말이 상대에게 가 닿는다는 게 사극의 매력이다. 일례로 셰익스피어 극에서 ‘운명아 오너라’ 같은 대사는 그 자체로는 어색하지만, 그런 대사들로 구축된 메커니즘은 굉장한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영화가 그렇다.”
김상헌 역 김윤석
첫 사극인데 정통사극 제대로 만나
빈틈없는 대사, 사전 찾아가며 연기해
이병헌은 진지하고 집중력이 대단
-빈틈없이 짜인 대사들이 배우에겐 감옥 같았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김=“대사의 자유가 자칫하면 작품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조사 하나까지 철저하게 지켰다. 김상헌이 대장장이 날쇠(고수)를 찾아가 격서 전달을 부탁하면서 ‘내가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라고 한다. ‘너뿐이다’가 간지러워서 ‘너밖에 없다’로 바꾸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황동혁 감독이 원래 문장이 더 절박한 뉘앙스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다. ‘참람’이란 단어도 나온다. ‘참담’의 오타 아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치다는 뜻이다. 국어사전 찾아보면서 연기했다.”
이=“나는 촬영 초반에 황동혁 감독에게 부탁했다. 늘 은유적으로 말하는 최명길이 한번쯤은 직설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황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달 반 뒤에 고친 대사를 줬다. ‘오랑캐 발 밑을 기어서라도 백성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격정적인 대사였다. 물론 그때도 왕을 똑바로 쳐다보진 못한다(웃음).”
-상대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이=“김윤석씨와 마주하고 연기한 적이 거의 없다. 왕 앞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말을 주고받아도 왕에게 튕겨서 전달된다(웃음). 눈빛과 표정은 못 보지만 목소리 떨림에서 열이 가득 느껴졌다. 뜨거운 배우였다.”
김=“이병헌씨는 집중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진지했다. 파트너로 함께한 시간이 행복했다. 두 사람이 말로 치고받을 때는, 그걸 다 들어줘야 하는 왕이 괴로웠을 거다(웃음).”
-스크린에 겨울 한기가 가득하다. 촬영할 때 어렵지 않았나.
김=“추위는 견디면 되는데 도포자락이 자꾸 발에 밟혀서 애먹었다.”
이=“입김이 많이 나와야 상황이 더 생생하게 전달될 텐데, 입김이 안 나와서 고생했다. 지구 온난화가 문제다(웃음).”
-인조는 결국 청에 무릎을 꿇고 3배9고두를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치욕의 역사를 오늘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용감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현실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기 때문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치이는 지금의 정세도 380년 전 역사와 흡사하다.”
김=“패배했지만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난국을 헤쳐 가려는 이들이 있었다. 과거의 상처를 감추지 말고, 밖으로 내보이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
-차기작 계획은.
김=“부산에서 영화 ‘암수살인’을 찍고 있다. 추석 연휴에도 내내 촬영할 것 같다. 일하는 게 행복하다. 일이 있어 휴식이 달콤하고, 밥도 맛있고, 집도 그리워지는 것 같다.”
이=“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선샤인’을 기다리고 있다. 드라마는 오랜만이라 살짝 겁난다. 촬영 전까지는 개인 시간을 가지려 한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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