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는 세계의 위인으로 존경 받지만, 그가 활약하던 지난 세기서부터 현재의 인도 국민 중에도 그가 과도한 평가를 누린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비폭력주의자이기 이전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였던 간디가 인도 자치권 획득을 위해 1, 2차 대전에서 인도 청년들에게 영국 편에 서서 참전하라고 독려한 일, 빈농과 카스트 하층민보다 지주와 상공인 등 자본가의 이익을 앞세운 점 등이 그가 비판 받는 점들이다. 즉 그는 자치ㆍ독립의 상위 가치를 위해서만 비폭력주의를 고수했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은 계급ㆍ신분의 생존권 및 인권 요구는 등한시했다. 그가 이끌던 인도국민회의의 재정적 지지기반이 지주와 자본가들이었다.
청년 독립운동가 바가트 싱(Bhagat Singh, 바겟 싱, 1907.9.28~1931.3.22)의 재판 및 처형 과정에 간디가 미친 영향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HSRA) 회원이던 23세 청년 싱은 1929년 4월 일련의 식민지 악법에 분노, 한 동료와 함께 델리 중앙입법의회장에 사제 폭탄을 투척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명 살상용이 아닌 엄포용 사제폭탄을 준비했고, 도주할 기회를 버리고 의연히 체포됐다. 그리고 재판정을 식민지배의 불의에 대한 정치투쟁의 장으로, 인도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결집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인도인의 분노를 간디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표출했던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 당했다.
그 과정에서 간디가 그의 처형을 넌지시 독려했다는 설, 사형을 모면케 할 수 있었지만 사실상 방조했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주의 지식인이자 인도공산당 정치인인 P. M. S. 그레왈이 쓴 평전 ‘바가트 싱’(정호영 옮김, 한스컨텐츠)도 그런 쪽으로 쓰여진 책이다. 간디는 일주일 뒤 ‘영 인디아’라는 매체에 글을 썼다. “국민회의가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영웅이고 우리는 거기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직후 카라치에서 열린 국민회의 전당대회 전야제 행사장에서 일군의 청년들이 검은 만장(挽章)을 들고 ‘간디 타도!(Down with Gahdhi!)’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물론 간디 지지자들은 간디에게 재판에 개입할 만한 영향력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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