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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유치원생 손에 들린 핵무기

입력
2017.09.2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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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와인버그.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라 할 수 있다. 10년 전 와인버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그와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나는 서구 과학문명을 최전선에서 이끌어 온 한 과학자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꼈다. 인터뷰 막판에 나는 현대문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물었다. 와인버그는 의외로 전면적 핵전쟁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여전히 엄청나게 많은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연히 어떤 실수가 생겨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북한과 미국의 긴장이 높아지고 유엔 총회에서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와인버그의 우려가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현실화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우발적 충돌이나 시스템 오류 또는 인간의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 상황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지난 23일에는 미국의 전략폭격기가 동해 북한쪽 국제공역을 비행했다. 지금은 남북 사이의 핫라인도 모두 끊긴 상태라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

어떤 이들은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이번 기회에 북한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곧 핵전쟁이다. 전쟁을 하고 싶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재래식 전쟁에만 대비해 온 우리의 셈법부터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인류 역사상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 폭탄 ‘리틀 보이’와 3일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폭탄 ‘팻 맨’ 뿐이다. 리틀 보이의 파괴력은 TNT 1만5,000톤 규모이다. 지상 약 560m 상공에서 터졌으며 폭발 직후 폭심의 온도는 태양표면의 1만 배에 달하는 6,000만 도까지 올라갔다. 폭심 반경 1 ㎞ 안의 사람들은 모두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엄청난 폭발력에 의한 공기 충격파의 위력은 폭발 직후 ㎡당 7t 정도의 무게가 짓누르는 압력과 맞먹는다. 뿐더러 수많은 종류의 방사선이 사방으로 쏟아진다. 폭발 직후 몇 초 동안 히로시마 인구의 25%에 달하는 8만여 명이 사망했다.

만약 히로시마 급 핵폭탄이 세종로 네거리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 남북으로는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동서로는 탑골공원에서 경희궁까지 이르는 지역 안의 사람들은 엄청난 열기에 증발해 버린다. 대략 남산에서 청와대, 그리고 동대문에서 이화여대에 이르는 더 넓은 지역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죽는다.

최근 북한의 6차 핵실험 폭발력이 크게는 TNT 12만t 규모로 추정된다. 히로시마 급의 10배에 가까운 위력이다. 이 정도 폭발력의 핵무기가 광화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 서울의 강북지역은 거의 모두 초토화된다. 서울 시민의 10%만 사망해도 무려 백만 명이다. 건물 파손이나 방사선 등에 의한 피해까지 고려하면 수백만 명이 사망할 수도 있다. 재래식 전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핵무기 한 발이 주는 피해 상황이 이 정도이다. 여기까지는 알려진 과학기술로 추정할 수 있는 대략적 피해상황이다. 전쟁을 하고 안 하고는 정치와 외교, 군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전쟁을 꼭 해야겠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정도의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전쟁을 통해 꼭 얻어야 할 무언가가 있는지, 이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희생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평범한 서울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내자면,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고귀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목숨과 맞바꿀 수는 없다. 수백만 명이라는 숫자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조차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면 6.25 전쟁 동안 한국군 전사자 수는 약 13만 8천 명, 민간인 사망자는 약 24만 5천 명이다. 전쟁으로 북한을 완전히 궤멸시킨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수도 서울의 절반이 초토화되면 우리 또한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배후의 중국을 생각한다면 미국이 섣불리 북한을 핵으로 공격하기란 쉽지 않다. 북한의 국력으로 미국과 동등한 핵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핵개발이 대미 협상용이라 하더라도 한반도 공멸을 자초할 핵무기를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북한의 핵무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미국 또한 대북 적대정책을 전향적으로 폐기하고 한반도 정전체제를 하루 빨리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조차 수준 이하의 막말로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킨 행위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이 주고받는 말폭탄을 두고 “마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 같다”고 일갈했다. 문제는 그 유치원생들 손에 엄청난 위력의 대량살상무기가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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