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들은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낸다. 안무가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자체로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가 되기도 하고, 무용에서 여성의 삶과의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현대무용의 대를 이어 나가고 있는 안무가 3인이 한 무대에 각각의 작품을 올린다. 전미숙(59), 차진엽(39), 김보라(35) 안무가가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ㆍ시댄스)에서 함께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을 최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에서 만났다.
전미숙 한예종 교수는 1981년부터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하며 세계적 수준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차진엽과 김보라는 한예종에서 전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제자들이다. 국내 현대무용을 이끌고 있는 LDP무용단 창단멤버인 차진엽은 Mnet 프로그램 ‘댄싱9’에서 심사위원을 맡으며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기존 공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퍼포먼스를 펼쳐 왔다. 김보라는 자신이 예술감독인 아트프로젝트보라를 이끌며 독창적인 안무를 시도하고 있다.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데는 요즘 무용계의 현실이 계기가 됐다. 무용계에서 갈수록 여성 무용가들이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 자극이 됐다. 최근 10여 년 사이 주로 떠오르는 안무가가 남성들일 정도로 무용계에서 남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예종 교수들도 몇 년 새 성별이 역전됐다. 전 교수는 “요리, 미용 등 여자들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분야에서도 대가들은 남자들이 더 많다”며 “왜 그런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기만의 독보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두 제자가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무용계에서 남성들이 늘어난 건 생물학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보라는 “남성 무용수들이 늘어나면 건강한 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남성 무용수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반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차진엽은 “‘너 의외로 여성스럽다’와 같은 판단이 불편했다”며 “무슨 일을 하든 여성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는 게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의 ‘아듀 마이 러브’는 2001년 발표된 작품이다. 무용수로서 압박감을 느끼던 40대에 은퇴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춤을 추다 보니 제가 춤에 대해 느끼는 무게감이 여성의 삶과 비슷하더라고요. 저에게 춤이란 여자의 가사노동과도 같았던 거죠.”(전 교수) 붉은 천과 거대한 ‘상’이 등장하는 무대는 이러한 압박감을 표현한다.
30대 두 무용가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결국은 여성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의도적으로 여성주의를 표방하며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차진엽은 “편견이 된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비판의식을 예전엔 더 많이 담았다면 지금은 여성의 심리와 몸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작품 ‘리버런: 불완전한 몸의 경계’는 제임스 조이스의 책 ‘피네간의 경야’에서 영감을 받았다. 책의 시작과 마지막 단어가 ‘리버런’으로 같아 책이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순환구조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비유했다”며 “출산을 하는 여성의 몸도 생명의 탄생과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김보라의 ‘100% 나의 구멍’은 그가 초빙한 댄서들이 안무를 만들고 자신이 무용수가 되는 방식을 취한다. 제목의 구멍은 몸에 있는 구멍, 혹은 보이지 않는 허점, 비어있는 공간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김 안무가는 “제게 구멍이란 ‘안무가’라는 역할이었다”며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를 허물고 관객과 무대의 경계까지 허문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작품은 10월 25,26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선보인다. 특정한 메시지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작업 안에서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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