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분간 일관된 메시지로 호소
‘베를린 구상’ 틀은 유지하되
제재와 압박도 가미 수위 조절
냉전 종식시킨 레이건 언급
한국의 촛불혁명 소개하며
평화적 해결 원칙 재확인
문재인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총회에서 원고지 30매 분량의 기조연설문을 통해 국제사회의 당면 현안인 북한 핵 문제의 다자주의적 해결을 강조했다. 북핵 해결 방안과 관련해선 7월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밝힌 ‘베를린 구상’의 골격을 유지했지만,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정상 간 대화 등 남북 간 구체적인 대화 제안은 삼가고 제재와 압박을 언급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22분 간의 유엔총회 데뷔 연설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32번 언급하는 등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일관된 메시지를 호소하는 데 주력했다.
文 정부의 ‘베를린 구상’ 수위 조절
문 대통령의 기조연설에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대전제를 유지하되, 최근 북한 6차 핵실험과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안 2375호 채택 등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을 의식해 ‘제재와 압박’에 초점을 맞출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문 대통령도 15일 북한의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 직후 “이런 상황에선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화라는 표현이 상당히 줄었지만 제재와 압박이란 언급도 강도가 크지는 않았다. 7월 발표한 베를린 구상의 기본 원칙도 유지됐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붕괴나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과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겠다”, “북한이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한다” 등 베를린 구상의 기본 원칙들을 재차 거론했다. 베를린 구상은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구상을 집대성한 결과물인 반면, 이번 유엔총회 기조연설은 북한 핵ㆍ미사일의 고도화에 따른 국제적 공조를 촉구하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거듭된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안해 연설 수위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레이건ㆍ촛불혁명 거론하며 평화 강조
문 대통령은 “모든 나라들이 안보리 결의를 철저하게 이행하고 북한이 추가 도발하면 상응하는 새로운 조치를 모색해야 한다”며 추가 제재 가능성도 거론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모든 노력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북핵 문제를 둘러싼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기존의 한반도 전쟁 불가론을 재확인했다.
특히 이 대목에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말을 인용해 눈길을 끌었다. 미소 간 군비 경쟁 가운데 냉전을 종식시킨 레이건 전 대통령을 언급한 것은, 북한에 대해 ‘완전 파괴’를 언급하며 군사적 옵션까지 배제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자칫 우발적인 북미 간 군사적 충돌로 한반도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북핵 문제를 둘러싼 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어 한국의 촛불혁명을 소개하고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내년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협력도 잊지 않았다.
다자주의 대화 등 유엔 역할론 부각
문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다자주의 대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유엔정신의 구현을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핵ㆍ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북한을 대화테이블로 이끌어 내기 위해 한반도 주변국의 제재와 압박뿐만 아니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동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동북아 안보의 기본 축과 다자주의가 지혜롭게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신경제지도와 신북방경제비전을 거론했다. 동북아 경제공동체와 다자간 안보협력이란 두 축으로 동북아에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유엔의 역할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유엔은 인류 지성이 만든 최고의 제도적 발명품”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역할과 기여는 갈수록 더욱 커질 것”이라고 추켜 세웠다. 이어 “초국경적 현안이 날로 증가하고 이제 그 어떤 이슈도 한두 나라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며 “유엔정신을 더욱 전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욕=김회경 기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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