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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수치가 답할 차례다

입력
2017.09.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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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의 쿠투팔롱 로힝야족 난민캠프에서 한 어린이가 식량 배급을 기다리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콕스 바자르=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의 쿠투팔롱 로힝야족 난민캠프에서 한 어린이가 식량 배급을 기다리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콕스 바자르=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오래 갔다.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어른들 틈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소년. 굶주림에 지쳤는지 초점 없는 소년의 눈빛이 말을 거는 듯했다. “죄 없는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두려움, 슬픔, 분노, 체념, 증오…. 본보 정민승 특파원이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에서 전해 온 로힝야족 난민들의 얼굴에는 인간의 모든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은 이들이 벌써 42만여명을 헤아린다. 인구 절반 가까이가 한 달도 안돼 삶의 터전을 등졌다.

난민.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박해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난민은 어려운 문제다. 지금도 아프리카, 중동에서 끊이지 않는 내전과 그에 따른 이산(離散)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숨기고 있다. 과거 식민지로 달려간 제국주의는 용이한 수탈을 위해 종족 갈등 등 내분을 부추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독재와 전쟁을 견디다 못한 식민지 후예들이 거꾸로 유럽으로 몰려 들고 있으니 사실 강대국은 불법 난민에 불평할 자격조차 없다.

로힝야족 사태의 연원도 다르지 않다. 영국은 19세기 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을 배제하고 로힝야족을 이주시켜 식민 경영의 도구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얀마 독립군을 억압하는 용병으로도 썼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 격인 로힝야족에게 현지인들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실제 미얀마 내 반(反)로힝야 정서는 상상 이상이어서 이들을 아예 ‘벵갈리(방글라데시 불법 이민자)’로 치부한다. 로힝야족이 주로 믿는 이슬람에 대한 배타성까지 더해져 ‘폭도’란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과거사가 그렇다고 이 잔혹사도 마냥 두고 봐야 하는가. 참수한 시신을 독수리 밥으로 내다 버리고, 심지어 짐승이 먹기 편하도록 숨진 이의 피부를 벗기는 극단의 만행이 로힝야 마을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보복은 더한 보복을 낳는다. 아비의 몸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눈에 담은 아이가 온전히 살아 가길 바라는 건 무리다. 어쩌면 오늘의 난민 사태는 훗날 더 큰 비극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살육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미얀마의 상징 아웅산 수치가 되리라 짐작하고 기대했다. 미얀마 국민은 수치를 ‘아메이 수(어머니 수치)’라 부른다. 민중과 민주주의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 온 영웅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다. 수치의 위대함은 단순히 민주화의 선봉을 맡아서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난민’을 감내한 21년 동안 끝까지 비폭력투쟁을 고수했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복종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공포로부터의 자유)” 노벨평화상(1991)을 비롯해 그에게 안겨진 30여개의 인권상은 불복종 신념을 향한 국제사회의 보답이었다.

그런 평화의 투사가 현실 정치에 발을 담갔다는 이유로 공포에 복종하라며 눈을 감고 있다. 침묵하던 수치는 최근 난민송환 방침 등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가 거센 비난만 받았다. “(로힝야 사태 외) 문제가 없는 부분도 살펴야 한다”면서 인권탄압의 책임은 계속 미뤘다. 강경한 국내 여론과 여전히 기세 등등한 군부에 얽매여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고뇌가 읽혀진다. 그러나 정치공학적 셈법을 떠나 인종혐오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수치가 모를 리 없다. 우리의 고귀함만 내세우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다 보면 결국 나의 인간성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치 말이다.

영화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은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무자비한 학살 속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1,268명의 생명을 지켜냈다. 이름 모를 범부(凡夫)도 이럴진대 만인의 어머니로 추앙 받는 수치가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제 답해야 한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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