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영어 공부에 도전한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스승이 된 구청 공무원의 우정 안에 가슴 아픈 역사를 담아낸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누구도 나옥분(나문희) 여사를 말릴 수 없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잘못을 지적하고 참견하는 게 옥분의 하루 일과다. 옥분이 20년간 구청에 접수한 민원만 8,000건. 그래서 구청 공무원들에겐 블랙리스트 1호, 또는 도깨비 할매라 불린다. 까다로운 민원인 옥분이 나타나면 구청엔 경계령이 떨어지지만, 구청에 새로 부임한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원칙’으로 옥분을 대한다.

그렇게 옥분과 민재 사이의 긴장감이 날로 커져가던 어느 날, 옥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민재를 우연히 보게 된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고민인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 과외를 부탁하고, 옥분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 민재는 옥분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옥분에겐 영어로 말해야만 하는, 특별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아이 캔 스피크’(21일 개봉)는 할머니와 손자뻘 공무원의 우정을 그린 휴먼코미디 영화다. ‘스카우트’(2007)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쎄시봉’(2015) 등을 연출한 김현석 감독이 오랜만에 장기를 발휘했다. ‘킹스맨: 골든서클’과 ‘남한산성’ 같은 대작 영화들의 공세에, 나문희와 이제훈, 세대를 뛰어넘은 투톱 주인공이 유쾌하게 맞선다. 추석 연휴 스크린 대전의 막을 여는 영화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20자평과 별점

★다섯 개 만점 기준, ☆는 반 개.

영어 과외를 해달라는 옥분의 간절한 부탁에도 민재는 요지부동이다.
바른 태도가 빚어낸 큰 울림

우선,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 줘서.

세상에 둘도 없을 참신한 이야기도, 놀랍도록 빼어난 만듦새도 아니다. 하지만 완성도를 굳이 따지고 싶지 않을 만큼, 주제를 대하는 태도와 시선이 좋다. 일흔 넘은 나이에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주인공의 아픈 사연을 재현하거나 전시하지 않고도, 영화는 그 아픔을 우리 모두의 시대적 과제로 사유하게 만든다. 바른 태도는 백마디 말보다 울림이 크다.

웃음은 이 태도에서 파생된, 또 다른 미덕이다. 코미디가 주제를 흐리지 않게끔 딱 알맞다. 소소한 말장난과 순박한 인물들이 빚어낸 웃음이 정겹고 따뜻하다. 그 온기로 상처를 보드랍게 어루만진다. 씻은 듯 아물지는 않더라도, 더 이상 쓰라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 영화는 역사의 피해자들이 계속 아파하고 있을 거라는, 섣부른 연민과 이해도 가볍게 뛰어넘는다. 옥분 할머니와 시장 사람들, 구청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공감과 연대로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 옥분 할머니가 단호하게 “아이 캔 스피크”를 외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에 대한 예우는 이 영화의 진짜 성취다.

나문희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문희의 고운 결로 빚어낸 옥분은 귀엽고, 결연하고, 애잔하고, 무엇보다 존경스럽다. 나문희의 곁에서 버팀목이 된 이제훈과, 제 자리에 꼭 들어맞는 조연들까지. 이름값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조화로움을 ‘환상의 캐스팅’이라 불러야 한다.

김표향 기자

‘민원왕’ 도깨비 할매는 왜 영어를 배우려는 걸까.
‘곰팡이’ 취급 받는 약자의 현실

나옥분은 ‘곰팡이’ 같은 존재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행여 양지로 나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하며 그를 단속한다. 친동생은 “제발 연락하지 마라”며 누나에게 등을 돌리고 산다. 옥분을 곰팡이로 만든 건 누군가. 시대의 반인륜적 음습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옥분이 홀로 사는 수선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둡다. 곰팡이처럼 살 길 강요당한 옥분은 왜 상습 ‘민원꾼’이 됐을까. 그에게 세상의 온갖 그늘을 들쑤시는 민원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다. 듣지 않으려는 세상을 향한 ‘나 같은 곰팡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절규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대에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영화는 이 묵직한 주제를 코미디의 외피를 씌워 우습지 않게 전한다.

시대적 고민을 친근하게 표현했다. 반전으로 한 방을 노린 영화적 구성도 비교적 단단하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 준 울림은 영화의 큰 미덕이다. 민재가 구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각성의 장면에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택시운전사’의 운전사 3인방이 등장해 차량 액션을 펼치는 장면처럼 터무니없진 않으니 안심을. 나문희는 존재만으로도 ‘눈물샘’이다. 이야기의 밀도는 아쉽지만, 가족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

양승준 기자

명불허전 나문희와 영리한 이제훈이 빚어낸 연기 호흡이 훌륭하다.
웃음, 눈물, 연민, 연대의 절묘한 배합

김현석 감독은 웃음과 낭만에 강하다. 남녀의 농밀한 관계를 재치로 풀어내며 유쾌함과 아련한 정서를 불러내왔다. 그렇다고 가벼움에 매몰되진 않았다. 그의 코믹 로맨스에는 시대가 담겨있다. 연출 데뷔작 ‘YMCA 야구단’(2002)은 신문물인 야구에 눈뜬 양반 자제 호창(송강호)과 신여성 정림(김혜수)의 연정을 매개로 일제 침탈에 놓인 시대의 어둠을 드러낸다. ‘스카우트’는 1980년 괴물 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사랑과 시대의 급류에 휩쓸린 호창(임창정)의 비운을 웃음과 눈물로 전한다. 유신시대를 배경으로 한 ‘쎄시봉’도 궤를 같이 한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웃음과 낭만과 사회적 메시지라는 이질적 요소를 능숙하게 배합해 온 김 감독의 재능이 유난히 빛나는 영화다. 현대사의 어둠을 소재로 삼을 때 쉬 빠지게 되는 엄숙주의의 함정을 비껴간다. 대중성을 고려하며 웃음을 강조하다 정작 메시지는 놓쳐버린 여러 한국영화의 전철을 밟지도 않는다. 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계층까지 다른 옥분과 민재의 우정과 연대가 흐뭇한 감동을 빚어낸다. 경사가 꽤 높은 산을 산보하듯 오르는 기분이라고 할까. 게다가 나문희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라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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