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한 삶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구름의 은유를 사용한다. 실시간으로 형상과 색체가 바뀌는 구름. 여름엔 뭉게구름 먹구름이 대세인데, 가을엔 하늘하늘거리는 새털구름이 대세. 오늘은 아침부터 큰 굉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인공 새들이 날아다니더니 하늘에 새겨진 긴 비행운. 얼마 전 북에서 태평양으로 날려 보낸 미사일도 사나운 비행운을 남겼을까. 하여간 구름을 가지고 노는 하늘은 장난꾸러기. 하늘 성품을 닮아 구름을 보며 유희를 즐기는 시인도 장난꾸러기.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들판은 파랑 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신현정, ‘하나님, 놀다 가세요’)
염소들 곁에 내려와 서로의 뿔을 부딪치며 노는 신의 춤이 무슨 실용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춤을 통해 하늘과 땅, 조물주와 피조물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은 소중하다. ‘무엇을 위해?’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춤과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 철학자 니체는 그래서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겠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춤은 따로 목적이 없다. 순수한 기쁨과 희열의 소산인 춤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구름의 춤, 나비의 춤, 아이들의 춤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명성이나 박수갈채가 없어도 우주의 춤은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삶을 긍정하는 이유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절망적이어도 매일 아침 일어나 구두끈을 조여 매고 길 위로 나설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은 젊은 조각가의 집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새털구름을 머리에 이고 조각가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새로 형성된 혁신도시의 작은 오피스텔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촉망 받는 예술가임에도 하루하루의 생계 때문에 일주일에 사나흘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가니, 사방 벽엔 갤러리처럼 그가 만든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꽃과 풀과 구름과 사람들을 어우러지게 하여 빚어낸 독창적인 작품들. 신산스럽고 무지근한 삶이지만, 그의 작품엔 오가리 든 병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힘든 생계를 꾸려가느라 얼굴은 때꾼해 보였으나 예술을 사랑하는 그는 넝마살림을 살고 있는 듯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문득 떠오른 그리스 출신 작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적도 지역에서는 지극히 가늘고 긴 실처럼 생긴 벌레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파먹는다고 한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무당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를 찾아온 무당은 마술의 피리를 불어준다. 그러면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간 벌레는 피리소리에 홀려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밖으로 기어 나온다고. 그러니까 무당의 피리소리로 인해 무서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이 이야기 말미에 작가는 “예술의 피리가 그러하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고 덧붙인다.
변화무쌍한 형상과 색체를 보여주는 구름의 예술 피리, 생계가 어려운 조각가가 나무를 깎아 보여주는 예술 피리, 입에 겨우 풀칠을 하고 살면서도 ‘춤추는 신’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예술의 피리가 그러하다’며 삶을 긍정하는 작가와 철학자.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몹시 고달프지만, 그들이 부는 예술피리는 인간의 숱한 고통을 치료하고, 도무지 삶의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세상에 희망을 선사하는 게 아닐까.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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