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이상 거침없는 말폭탄
“중ㆍ러, 제재 동참에 감사하고 싶다”
군사 공격보다 국제사회 공조 요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만 한다면 북한을 완전하게 파괴(totally destroy)하는 선택 외에 없다”고 말하며 역대 미국 지도자 가운데 가장 강경한 어조로 북한 김정은 정권의 핵ㆍ미사일 도발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약 41분의 전체 연설 가운데 ‘완전 파괴’ ‘자살 임무’ 등 북한을 겨냥한 최고 수위의 무차별 말폭탄은 5분 이상 거침없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불량 정권’, ‘타락한 정권’, ‘범죄집단’, ‘재앙’, ‘사악한 소수’, ‘악’ 등 사실상 정치인이 하나의 집단이나 개인을 겨냥해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정적 수사와 단어를 이 짧은 시간 동안 총동원해 김정은을 극단으로 몰아붙였다. 2002년 의회 연두교서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란, 이라크를 규정했던 ‘악의 축’의 표현 수위를 훌쩍 능가하는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발언한 대목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사적 선택지를 표현한 ‘완전한 파괴’는 그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엄청난 선언(워싱턴포스트)”이다. “로켓맨(김정은 지칭)은 자신과 체제를 자살로 몰고 있다”는 사실상 ‘죄목’을 붙이고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동원해 2,500만 인구의 한 국가 자체를 지도상에서 지우는, 유례없는 군사 공격을 가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정도의 선언이라면 대통령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과장된 수사가 아니냐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화합과 공조를 추구하는 유엔 무대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표현을 쏟아냈지만, 전문가나 미 현지 매체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마크 토콜라 한미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완전파괴’ 등의 용어가 부각되긴 했으나 연설의 전체 맥락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데 유엔 회원국들이 단합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이는 군사행동없이 북한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을 예고한 것이라기 보다 모든 유엔 회원국들이 무역과 재정지원을 끊으면 북한이 결국 도발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란 외교적 해법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WP는 상대의 공포를 유발해 협상의 우위에 서려는 ‘미치광이 전략’으로 분석했다.
사라 허커비 샌더슨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뒤 트위터에 “오바마 전 대통령도 지난해 ‘우리는 우리 무기로 분명히 북한을 파괴할 수 있다’고 했다”고 적었다. 미국 대통령들이 통상적으로 해온 경고 발언이라는 취지로 수위를 조절한 것이다. 연설 후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도 “국무장관이 국제적 절차를 통해 북한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의 ‘완전 파괴’는 ‘방어해야만(forced to defense)’ 하는 상황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선제적 대북 공격 보다는 북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 공격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준비가 돼 있고 의지가 있고 능력도 있지만, 이것(완전 파괴)이 불가피한 일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에서 북한과 무역 관계를 맺어온 중국과 러시아를 직접 비판하지 않고, “안보리 제재 결의에 동참한 데 대해 중국과 러시아에 감사하고 싶다”며 말한 대목이다. 북한을 방조한 나라의 책임을 규탄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 비판을 억제했다고 보여진다. 이들의 협조 없이는 북핵 해결이 어렵다는 현실을 수용한 것이다. 다만 “어떤 나라들이 북한 정권과 무역을 한다면 불법행위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핵위협에 빠트리는 나라에 무기를 공급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것”이라면서 사실상 중러를 공격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외교적 수단으로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이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행동을 강조한 것이다.
이밖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관련 연설 중 도입부분에 말한 “북한보다 더 투옥과 고문, 살해, 그리고 수많은 억압을 가하는 체제는 없다. 무고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돌아온 지 수일 뒤에 사망했을 때 북한의 끔찍한 학대를 목격했다”고 한 대목은 북한 핵무장의 위험성을 인식시켜 국제사회의 단합된 행동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공항에서 금지된 물질로 독재자의 형이 암살 당하는 것을 지켜봤고, 13살짜리 일본 소녀가 납치돼 노예가 된 사실도 안다”고 한 발언도 일본과 아시아 국가 등 동맹과 주요국들의 공조를 이끄는 수사이다.
이 같은 외교적 압박이 효과를 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레토릭은 ‘비핵화냐 전쟁이냐’는 기로에서 조급한 결단을 요구하는 모양새여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사실상 반인륜적 범죄집단으로 규정, 비핵화 외에는 대화의 여지 자체를 없애 양측의 마찰 강도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더욱 강경한 도발에 나서면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달릴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빗 패트레이어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최근 “예측불가의 인물로 비치게 하는 트럼프의 이 같은 ‘미치광이 전략’이 위기 전까지는 장점이지만, 위기시에는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위기 국면에선 북한의 오판을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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