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지능력 있는 외계행성의 바다
접촉 후 이상해지는 탐사팀원
외계와의 소통이란 가능한가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성찰
#2
서구서 높이 평가된 폴란드 작가
사고실험ㆍ철학으로서 SF 추구
독창적 풍자ㆍ블랙유머의 대가
“통속적 타락” 미국 SF 비판도
1970년대 중반, 미국SF작가협회의 작가들이 양 편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격분해서 협회를 탈퇴하는 이까지 나왔다. 이들이 대립한 이유는 명예회원 자격을 준 어느 외국 작가가 그런 대우를 반기기는커녕 미국 SF를 신랄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SF가 통속과 자본에 물들어 타락했으며 그 중심에 미국 SF가 있다고 봤다. 필립 K. 딕 말고는 미국에 주목할 만한 SF 작가가 아무도 없다고도 했다. 이렇듯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낸 사람은 폴란드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이었다. 그의 발언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서구 SF문학을 못마땅해 한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은 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렘의 입장은 그의 대표작 ‘솔라리스’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서구의 SF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심오한 인식론적 고찰을 펼치고 있다.
주인공은 솔라리스라는 외계 행성의 탐사기지로 파견된다. 그 행성의 거대한 바다는 하나의 생명체로 추정되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도착해보니 탐사기지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그에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과연 지구인들에게 어떤 ‘접촉’을 해 온 것일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면 우주를 향한 인간의 사유에서 인간중심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과연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지, 아니 이해하기 전에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지 섣불리 단언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깊숙한 경지로까지 사색을 이끄는 렘의 솜씨는 그가 SF를 순수한 사고 실험으로서 적합한 형식이라 여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렘은 신랄하고 독창적인 블랙유머의 대가이기도 했다.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연작단편집 ‘사이버리아드’(1965)는 SF 풍자의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사이버리아드’라는 제목은 ‘사이버’와 ‘일리아드’의 합성이다. 즉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를 컴퓨터 버전으로 다시 쓴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데, ‘사이버’라는 말이 컴퓨터 정보통신이 널리 보급된 90년대 이후에나 익숙해진 사실에 비추어보면 렘은 매우 선구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이버’는 의인화된 인공지능 로봇을 의미한다. 원래 ‘사이버’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은 물론이고 생명체까지 포함하여 자기제어가 가능한 하나의 독립된 시스템(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인간, 혹은 인간사회도 스스로 자기제어를 하며 항상 최적의 상태를 추구하는 시스템인 만큼 하나의 사이버메커니즘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렘의 ‘사이버리아드’도 제목부터가 사실은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왕과 신하, 왕자와 공주 등 서양의 중세를 연상시키는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갈등과 희극을 연출해내는 ‘사이버리아드’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쉴 새 없이 터지는 말장난(pun)의 향연을 펼친다. 사실은 그래서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힘든 점도 있다. 그와 함께 수시로 튀어나오는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발상도 백미인데, 예를 들어 ‘반역의 국유화’라든가 ‘아기폭격’, ‘휴대용 양방향 인격전환기’ 등등이다.
서구의 SF는 타락했다
렘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동유럽 출신이지만 소련을 비롯한 옛 동구권의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영미권이나 기타 서구사회와도 다른 틀거지의 독보적인 SF 세계관과 사유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과 문학의 결합’이 그동안 서구사회에서 빚어 온 SF라는 통속 장르로 한정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제까지의 장르 SF는 서구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주변을 공전하며 자기소모, 자기소진의 과정을 밟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경만 우주로 옮겨놓은 구태의연한 영웅담들은 차치하고라도, 과학기술의 기계적인 외삽이나 인간중심주의의 수평적 연장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철학’보다는 ‘산업’을 형성해 왔다고나 할까. 그러나 렘은 시종일관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전에 커트 보니것은 렘을 가리켜 ‘인간성의 야만적인 측면에 오싹하도록 놀란, 극단적인 비관주의의 대가’라는 평을 내린 바 있는데, 사실 이 비관주의에는 서구 SF에 대한 실망도 상당히 배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기본적으로 렘은 인간이 지식의 범위를 넓혀나가고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 SF작가들 대다수가 통속적인 엔터테인먼트에만 몰두하는 듯한 양상에 상당히 비판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솔라리스’를 비롯한 그의 방대한 저작들이야말로 렘 자신이 시도한,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과학소설’의 모습일 터이다.
한국 SF마니아에 세례 내린 작가
문학의 ‘풍자’와 ‘은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준 작가. 나는 초등학생 때 그렇게 렘을 만났다. 40대 이상의 SF 팬들 중에는 ‘아이디어회관 SF전집’에 끼어 있던 렘의 ‘욘 박사 항성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인공지능에게 완벽한 사회질서를 구현하라고 입력하자 전 국민을 원반으로 만들어 가지런히 배열해버린 외계 행성의 이야기라든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참고 항목들의 연쇄로 블랙홀이 되어버리고 마는 백과사전, 또 영문도 모르고 대피 훈련에 휘말렸다가 간첩 혐의를 받는 욘 박사 이야기 등등. 비록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축약본이었지만 블랙유머와 풍자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배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뒤 20대에 다시 접하게 된 렘은 또 다른 면모였다. ‘솔라리스’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로 먼저 보았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못 받았는데, 나중에야 렘의 원작을 읽고는 사실상 다른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솔라리스’는 영화에서처럼 SF의 설정을 빌어 떠나보낸 연인을 기억하는 로맨틱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인식의 한계를 다룬 심오한 철학적 탐구였다. 렘이 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못마땅해 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갔다. ‘우주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주제에 강렬한 울림을 느끼면서 ‘이 작가는 영미권 SF와는 뭔가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독자들은 렘의 진가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불운하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어판이 네 번이나 나왔던 ‘솔라리스’를 포함해서 현재 렘의 책은 모두 절판 상태이며, 그나마 수 십 권의 저작 중에서 한 번이라도 번역이 되었던 책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다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1972), 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하고 조지 클루니가 주연한 ‘솔라리스’(2002), 또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더 콩그레스’(2013) 등 영화로 각색된 몇몇 작품에서 렘의 흔적을 짚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내 독자들이 렘의 저작들을 접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스타니스와프 렘
1921년 9월 12일~2006년 3월 27일. 폴란드의 르보브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난 곳은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이다. 1939년에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강점한 뒤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이유로 공과대학 진학이 좌절되고 대신 가업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다. 1941년부터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자 신분증을 위조하여 유태인임을 숨기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2차 대전 뒤엔 의대를 나와 연구원으로 일하다 곧 전업 작가가 되었다. SF 위주의 소설과 에세이 등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며 과학에 바탕을 두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심도 깊은 철학적 사유를 펼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미권까지 포함해서 세계 SF문학계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SF작가’, ‘H. G. 웰스에 비견할 만한 중요 작가’ 등의 찬사를 받았다. 다 빈치나 갈릴레오처럼 당대의 여러 학문 분야에 통달한 ‘박학다식가(polymath)’로 추앙받았고, 철학적으로 불가지론자이자 무신론자였다.
<소개된 책> 소개된>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오멜라스 발행
사이버리아드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오멜라스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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