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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유럽] 폴란드 배관공이 프랑스 일자리 앗아간다고?

입력
2017.09.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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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노동자가 일자리 뺏는다”

프랑스 12년 전 EU헌법조약 거부

마크롱, 노동법 개정과 함께

EU 파견노동자 지침 개정 의욕

체류기간 단축 등 논란 재점화

최대 파견국 폴란드 거센 반발

내달 유럽이사회 논의 주목

"폴란드에 어서 오세요." 2005년 유럽헌법조약 비준 반대파들이 내세운 ‘폴란드 배관공’ 이미지를 역이용해 폴란드 관광청이 내놓은 홍보물이다. ‘폴란드 배관공’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면서 당시 프랑스 내의 논란을 풍자하고 있다. 폴란드관광청
"폴란드에 어서 오세요." 2005년 유럽헌법조약 비준 반대파들이 내세운 ‘폴란드 배관공’ 이미지를 역이용해 폴란드 관광청이 내놓은 홍보물이다. ‘폴란드 배관공’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면서 당시 프랑스 내의 논란을 풍자하고 있다. 폴란드관광청

12년 전인 2005년 5월, 유럽연합(EU) 회원국 수반들이 1년 전 서명했던 ‘유럽헌법조약’ 비준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 선거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헌법조약은 EU의 여러 조약에 흩어져 있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내무와 사법 등 다른 정책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내용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당시 헌법조약 반대파들은 1년 전 EU 회원국이 된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8개국에 주목했다. EU 회원국 국민들은 EU 회원국 내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당시 폴란드 배관공의 임금은 프랑스 동일 직종 근로자의 7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 착안한 반대파들은 ‘폴란드 배관공이 우리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주장으로 EU를 거부한다는 전략을 펼쳤다.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5월 29일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유권자들은 5% 차이로 헌법조약을 거부했다. 독일과 함께 유럽 통합을 주도해왔던 프랑스가 이 조약을 거부하자 EU는 2~3년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씨름해야 했다.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었지만, 폴란드 배관공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는 오히려 충족되지 못한 배관공 수요가 6,000명이나 됐다. 경제논리로 보자면 폴란드 배관공이 프랑스로 와서 일을 하는 게 프랑스 서민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폴란드 배관공은 150여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프랑스 건설사와 계약을 맺은 폴란드 협력업체의 파견 형식으로 근무했다. 프랑스가 EU 신규 회원국의 자유이동을 제한하는 과도기를 단축해 2008년 7월부터 동유럽 시민들의 자유이동을 허용했으나 폴란드 배관공들은 프랑스로 몰려들지 않았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프랑스보다 근로여건이 나은 영국을 택했다.

비세그라드 4국(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과 동부 동반자 국가(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몰도바) 외교장관들이 8월 3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부다페스트=신화 연합뉴스
비세그라드 4국(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과 동부 동반자 국가(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몰도바) 외교장관들이 8월 3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부다페스트=신화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4일 프랑스 동부 포르바크에 있는 한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포르바크=EPA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4일 프랑스 동부 포르바크에 있는 한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포르바크=EPA 연합뉴스

12년 전에 사그라졌던 ‘배관공 논란’이 최근 다시 여론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프랑스 제5공화국 최연소 대통령이 된 신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때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23일부터 사흘 간 동유럽을 순방하며 오스트리아ㆍ체코ㆍ슬로바키아ㆍ루마니아ㆍ불가리아 지도자들을 만났다. 반(反)이민정책으로 EU와 각을 세우고 있는 폴란드와 헝가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런데 마크롱 대통령은 동유럽 방문에서 ‘폴란드 배관공’ 논란의 원인이 된 EU 파견노동자 지침을 개정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문제가 된 파견노동자 지침을 보면 타 EU 회원국으로 보낸 파견 근로자의 임금과 복지 등 근로조건은 근무(주재)국이 아니라 파견국의 규정에 따르게 돼 있다. 자연히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파견한 저임금 노동자가 서유럽 근무국 내 고임금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을 것이란 지적이 일었고, 실제 제정에만 5년여가 걸릴 정도로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마크롱 대통령은 파견 기간을 현재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하고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주는 방향으로 지침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아울러 대기업들이 임금이 저렴한 동유럽 근로자를 고용하여 독일 등 부국에 파견하는 편법도 단속하려 한다. EU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7월 위와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내세우는 개정 이유는 “유럽의 가치를 위반하고 극우 정당의 발호를 돕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국내 정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일 프랑스 경제개혁의 중추로 삼은 노동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다. 여당 전진하는 공화국(LREM)이 장악한 의회는 개정안을 지지했지만,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 급진 노조단체로 두 번째 규모인 노동총동맹(CGT)은 12일 파리와 니스 등 주요 도시에서 20여 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여 신임 대통령의 개혁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은 EU 지침 개혁에 열중함으로써 유럽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국내에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12일 남부 마르세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총파업 방침에 따라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날만 프랑스 저녁에서 180여회의 집회가 열렸다. 마르세유=AP 연합뉴스
프랑스 노동자들이 12일 남부 마르세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총파업 방침에 따라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날만 프랑스 저녁에서 180여회의 집회가 열렸다. 마르세유=AP 연합뉴스

프랑스가 개정 논의를 선도하고 있지만 유럽에는 그의 동지들이 많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개정에 동의하고 있으며 체코와 슬로바키아 등 마크롱 대통령이 만난 동유럽 국가 수장들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반대로 폴란드는 “경쟁력을 훼손하는 어떤 조치도 반대한다”며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폴란드는 유럽국가들 중 가장 많은 파견노동자를 보내고 있는데, 특히 EU 탈퇴(브렉시트) 과정의 장기화가 예상되는 영국에는 83만명이 넘는 폴란드인이 거주하며 폴란드 본국의 경제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다음달 19일부터는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회원국 수반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가 개최된다. EU 탈퇴(브렉시트) 협상 진행 상황 점검과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유럽의 관계 설정이 주요 의제로 예정돼 있지만, 파견노동자 지침 개정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찬성 진영과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반대 진영 사이 논란이 거셀 듯하다. 이사회가 개정안에 합의해도 각국 장관들이 참여하는 각료이사회와 별도로 선출된 유럽의회가 법안을 승인해야 하므로 지침의 완전한 개정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파견 근로자 처우 논란을 일으켰지만, 개혁안의 방향을 보면 EU 파견 근로자 개개인의 대우는 전보다 좋아질 가능성이 높다. 비록 폴란드 등 파견국 입장에서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출신지에 상관없이 노동의 값어치를 동일하게 보장할 수 있다는 개혁안의 취지는 적극 지지할 만하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ㆍ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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