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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신문의 종말과 그 이후

입력
2017.09.1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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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글을 쓰게 된 뒤로 아무래도 이곳 칼럼들을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한국일보 칼럼들은 고르게 수준이 높다. 영광으로 여긴다. 11일자 지평선 코너에는 “‘이니 팬덤’의 레드 라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날카롭지만 점잖은 필치다. 내용은 상식적이다. 칼럼의 필자도, 한국일보도 특정 정치세력 편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한국일보 기사들이지만 아마 인터넷 한국일보 사이트보다는 포털 뉴스사이트를 통해 읽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게다. 14일 현재 네이버뉴스에서 위의 지평선 칼럼을 찾으면 400여 개의 댓글을 함께 볼 수 있다. 가장 호감이 높은 댓글은 ‘기레기들 니네 레드라인은 이미 넘었다 ㅋㅋ 맨날 거짓기사 날조하는 주제에 ㅋㅋ’다. 두 번째는 ‘어쩌라고 기레기 새끼들아. 니네 폐간할 때까지 후드려 패겠다’다. 세 번째는 ‘너네 폐간이나 걱정해라 븅들’이다.

한국 언론은 그 동안 특권과 특혜를 누렸다. 팬덤 정치는 우려스럽다. 그러나 이쯤 되면 그런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그냥 맥이 빠진다. ‘아, 신문은 이제 정말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끝나겠구나, 끝나는구나’가 아니라 ‘끝났구나’다.

신문사라는 회사나 기자라는 직군 이야기가 아니다. 신문이라는 매체 이야기다. 몇몇 신문사는 디지털 혁신과 사업다각화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떤 음반사들이 연예기획사로 변신했듯이. 기자라는 직업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수들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뉴스산업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것이고, 그 종사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신문은, 내 생각에는 레코드판 신세다. 지금의 저널리즘은 모습이 크게 변할 것이고 어떤 가치는 증발할 것이다. ‘한 앨범의 곡을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다’는 음악감상 문화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가치가 사라질까? 다시 말해, 신문은 무엇인가? 신문은 특종이 아니고, 통찰력 있는 칼럼도 아니다. 속보는 더더구나 아니다. 특종과 좋은 칼럼, 신속한 보도는 신문 이후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권위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오늘의 1면 톱기사고, 이 소식은 사회면 하단쯤에 실리면 되고, 이 뉴스는 일반 독자들이 알 필요가 없다’고 분류하던. ‘당신이 읽기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생각에는 중요한 기사니까 읽으라’고 강요하던. ‘이 얘기를 한번 해보자, 이런 점을 살펴보자’고 소리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들어야만 했던.

그 권위는 기득권 남성 중심적이라 소수자의 형편을 살피지 않았고, 자신들이 주장하던 바와 달리 전문성도 높지 않았다. ‘그들만의 이익’에 봉사한 경우도 흔했다. 업계, 회사, 개인 차원에서 모두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구심력이기도 했다.

그 권위를 복원하자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다. 젊고 순수한 기자들이 아무리 열정을 불살라도 불가능하다. 독자에게는 ‘1면 톱기사’가 아니라 그의 관심사와 취향을 파악한 알고리즘이 보내준 맞춤형 기사, 댓글 많은 기사, 친구가 공유한 기사가 전달될 테니까.

내가 보기에 한국 신문사들은 이미 그런 원자재를 포털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급하는 통신사 신세다. 공들여 특종이나 기획기사를 써봤자 신문의 브랜드와 분리되어 소비된다. 1면 톱기사보다 실시간 검색어의 영향력이 더 크다. 사설을 읽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것은 신문 이후의 세상이다. 뉴미디어는 어떤 사안을 고발하고 확산하는 데에는 뛰어나지만 사회통합의 기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기존 개념으로는 정의조차 내리기 어려운 새 매체들에 책임을 지우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파편화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알기 쉽고 자극적인 사건들이 복잡한 의제를 대체한다. 선명하고 이상적인 구호들이 논의와 협상을 대신한다. 그래야 겨우 여러 게토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도, 샌더스 현상도, 이것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인 현상이다.

매체환경의 변화를 어찌할 수 없다면 새로운 종류의 미디어 문해력(文解力)을 보급하는 게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함께 보라”는 식의 조언이 통하지 않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양 극단에 있는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 두 개를 받아보면 중도의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뉴스피드가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주장들로 뒤덮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문해력이 어떤 형태일지조차 잘 모르겠다. 어찌어찌 모습을 대강 그린다 해도 그렇게 어렵고 힘든, 게다가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할 ‘생각의 기술’이 쉽게 퍼질 것 같지 않다.

매스미디어 이후의 사회가 매스미디어 이전 사회보다 얼마나 나을지 지금 나로서는 감이 안 잡힌다. 공통의 목표나 지향 없이 이슈와 논란 위를 떠다니기만 하는 ‘초부유(超浮遊)사회’ 같은 것이 오지 않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든다. 어제와 그제 포털 뉴스사이트와 SNS는 어느 시내버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느냐는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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