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회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사전작업에 들어간 영국 의회가 테리사 메이 정부가 내놓은 ‘EU 탈퇴법’을 1차 통과시키며 메이 총리에 브렉시트를 둘러싼 ‘첫 승리’를 안겼다. 그러나 해당 법안에 숨어 있는 ‘헨리 8세 조항’이 내각 소속 장관에게 과도한 입법 권한을 부여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아 실제 법이 발효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영국 하원은 11일(현지시간) ‘EU 탈퇴법’을 2차독회(second reading) 단계에서 찬성 326 대 반대 290으로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영국의 EU 탈퇴가 예정된 2019년 3월 29일 발효된다. 탈퇴법은 EU가 제정한 법률 1만개 이상과 유럽사법재판소(ECJ)의 판례 등을 기존 영국 법률에 병합하고 향후 EU에서 제정된 법의 영국 내 적용을 중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서구 언론은 법안 통과를 메이 총리의 ‘서전 승리’로 전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메이 총리가 ‘EU 탈퇴법’ 통과를 통해 “첫 번째 거대한 장벽”을 넘었다고 적었고 영 일간 가디언은 메이 총리가 보수당과 노동당에 걸쳐 있는 ‘브렉시트 다수파’의 지지를 확고하게 다졌다고 분석했다. 메이 총리는 법안 통과 후 성명서에서 “의회가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법안이 “영국의 EU 탈퇴에 있어 확실성과 투명성을 제공하고 (브렉시트) 협상도 탄탄한 기반 위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최대 야당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 일부에서 “EU 탈퇴법이 내각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 목소리도 뜨겁다. 통과된 법안 곳곳에 내각의 장관들이 “의회의 활동에 준하는 법률 수정 작업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 이른바 ‘헨리 8세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EU법과 영국법의 병합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겠다는 취지지만, 보수당 비주류와 노동당에서는 메이 내각이 이를 남용해 기존의 영국 법률까지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헨리 8세 조항’이란 별칭은 16세기 헨리 8세 영국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포고만으로 법을 제정한 것과 유사하다는 의미다.
존 펜로즈와 도미닉 그리브 등 보수당 하원의원 일부는 “의회가 장관들에게 필요 이상의 권한을 넘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며 해당 조항을 보완한 수정안을 내놓았다. 펜로즈 의원은 가디언 기고에서 “브렉시트를 지체하자는 게 아니라 헨리 8세를 무덤에서 일으키지 말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브렉시트 예비장관 역시 “실망스런 결과”라며 향후 입법 단계에서 해당 조항을 중심으로 수정 작업을 벌이겠다고 경고했다. 영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앨런 그린은 “이 법안은 브렉시트를 빙자해 웨스트민스터(의회)의 입법권을 화이트홀(내각)로 대부분 넘겨 주는 법안”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영국 입법 절차상 EU 탈퇴법이 완전히 통과된 것은 아니다. 하원 입법 절차 중 하나인 ‘2차독회’를 마쳤을 뿐이다. 2차독회에서는 법률의 대강 취지만을 보고, 구체적인 조항별 검토는 각 부문 위원회에서 진행한 후 수정안이 전체회의에 다시 상정된다. 또 전체회의에서 통과되더라도 상원이 법안을 승인해야 한다. 하원 2차독회가 실질적으로 법률의 취지를 승인하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EU 탈퇴법이 큰 수정 없이 생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유럽은 “향후 브렉시트 과정에서 이민법이나 관세법 등 훨씬 논쟁적인 법안을 둘러싸고 영국 의회 내 다툼이 격화한다면 탈퇴법 역시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그레이트 리필(대규모 폐지)’이라고도 불리는 EU 탈퇴법은 2016년 10월 메이 총리가 처음 제안했다. EU 탈퇴로 인한 사법 공백과 정책 연속성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해 EU법 대부분을 관련 있는 영국 법으로 병합하고, EU 최고법원인 ECJ 등에서 담당하던 사법절차도 영국과 스코틀랜드 대법원 등으로 이관한다. 대신 1972년 EU의 전신 유럽공동체 가입을 위해 제정한 ‘유럽공동체법’은 폐기된다. EU법의 효력을 부정하고 그 조항을 영국 법으로 거의 손질 없이 들여온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잘라내기 붙여넣기 법(Great Cut-and-Paste Bill)’이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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