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워크숍에서 반가운 옛 동료들을 만났다. 이십여 년 전 원자력연구원에서 처음 만나 한솥밥을 먹은 인사들이다. 의욕 넘치던 젊은 연구자로 처음 만났던 그들이 이제는 원자력연구를 짊어진 중견의 과학자가 돼 후배들이 발표할 때마다 지식과 경험을 전해주고 때로는 젊은이들과 심도 있게 토의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중년 연구원들과 저녁시간에 기울이는 술잔과 유쾌한 농담도 참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정신 없이 흘러간 세월이었고, 빠르게 변화해간 시간은 그들과 필자의 이마와 얼굴에 주름만 남겨줬다.
필자가 근무하던 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라는 낯선 이름을 9년씩이나 사용해야 했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권은 기존의 핵주기 연구에 부담을 느껴 관련 연구를 모두 폐기하고 기관 이름마저 바꾸도록 했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누구도 반감을 표할 수 없었으리라. 재처리 연구에 참여하던 과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어버린 참담한 시기였다. 신군부는 핵재처리를 포기했지만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의 목표는 강하게 밀고 나갔다. 건설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는 신고리 5, 6호기도 바로 이때의 성과물이다. 하지만 탈 원전 드라이브라는 정책적 전환을 결정한 정부가 과학자들의 연구주제에 까지 손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모방이 아닌 창의적 연구가 필수적이다. 원자력관련 연구 분야에서도 창의를 바탕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바로 파이로프로세싱과 4세대 원전개발 연구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 후 핵연료를 재활용하기 위한 기술이고, 4세대 원전은 나트륨 등의 새로운 냉각재를 사용하는 새로운 원자력기술이다. 문제는 이 두 기술의 연구개발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 10월 이후 정부의 R&D 정책방향 결정으로 나타나겠지만,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두 기술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기술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5년간 과학계는 창조경제라는 유령을 좇아 이리 저리 표류했다. 하지만 이 정책을 통해 과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새로 창조된 결과물들은 거의 없었다. 지난 정권 초기부터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킨 창조경제는 결국 성과 없이 사라졌고 새로운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매달린다. 과학은 창의를 기초로 한다. 좁은 의미에서 창의란 두 개의 요소를 연결했을 때 전혀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새로운 기술적 요소와 접목시켜 더욱 발전시키는 가운데 창의적인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 이것이 좁은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과학자들이 바라는 21세기다.
만일 주제어에 4차 산업혁명적 요소가 들어 있으면 화이트리스트로 분류돼 대규모 연구지원이 이뤄지고, 탈 원전의 대상이 되는 연구들은 블랙리스트로 분류돼 지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과학입국을 추구하는 국가가 취할 정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코 현실화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불행하게도 슬금슬금 과학계를 적시고 있다. 연구지원을 바라는 많은 과학자들도 정부시책에 호응, 4차 산업혁명의 요소기술로 분류되는 것들을 슬그머니 주제어에 끼워 넣는다.
과학은 정책적 지원을 통해 발전한다. 하지만 창의를 원한다면, 대한민국을 더욱 강한 과학입국으로 만들고 싶다면 화이트리스트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연구주제를 선정해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이 결코 이슈를 통해 발전하는 게 아님을 지난 5년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건전한 판단을 하는 위정자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믿고 싶다.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정재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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