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무력감에 고개 든 전술핵 재배치 주장
비이성적 김정은에 ‘공포 균형’ 먹힐지 의문
국가미래 위해 이성적 사고로 심사숙고해야
핵억제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게 1962년의 쿠바미사일 위기다.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다 미국이 해상봉쇄로 맞서자 핵전쟁 위기를 깨달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계획을 포기한 게 핵억제력을 실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흐루시초프가 아닌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 초점을 맞추면 명백한 핵억제 실패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케네디도 핵전쟁 발발 가능성을 인식했지만 소련에 대한 미국의 핵우위를 믿고 비이성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핵은 핵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핵억제론의 근거는 ‘공포의 균형’이다. 가공할 파괴력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제어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핵전쟁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나 핵무기가 전쟁을 막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는 많다.
핵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세 차례의 전쟁을 벌였고, 최근 다시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인도의 육군참모총장은 “핵무기는 억제력의 무기이지만 전쟁의 위협을 없애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과 인도 영토분쟁에서도 핵의 존재가 전쟁을 막지 못했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북한 핵위협에 맞서기 위해 우리도 핵무장을 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독자 핵무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터라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가 합리적 대안인 것처럼 거론되고 있다. 한반도 전쟁을 막을뿐더러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협상장에 나오도록 하는 ‘신의 한 수’ 라는 주장이다.
전술핵무기가 도입됐을 경우 벌어질 상황을 생각해보자. 북한의 일관된 목표는 미국을 겨냥한 핵무기를 만들어 체제를 보장받자는 데 있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적 유지가 확보되지 않는 한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기할 리 없다. “북한은 풀을 뜯어먹어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말 그대로다. 북한이 전술핵에 공포를 느낀다면 취할 조치는 핵포기와 협상이 아닌 장사정포와 신형 방사포에 장착할 수 있는 전술핵 개발과 배치일 것이다.
남북한은 굳이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서로를 절멸시킬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다. 북한도 한미연합전력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60년 넘게 한반도에 전쟁이 억제된 것도 바로 전통적인 군사력 때문이었다.
전술핵 재배치는 ‘공포의 균형’이 아닌 ‘공포의 일상화’를 가져올 수 있다. 현재 미국이 보유한 거의 유일한 전술핵인 B61핵폭탄은 주한미군의 F-16, F-15E 전투기에 장착될 가능성이 큰데 이들 전투기는 현재 우리가 보유한 것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전투기의 상시적인 훈련을 미군의 핵공격으로 오인한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공포의 균형이 성립하려면 상대도 냉철한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예측불가능한 김정은의 존재는 우발적 충돌도 핵전쟁으로 비화시킬 위험성을 키운다.
대북 제재와 협상 측면에서도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을 상대로 핵ㆍ미사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수도, 중국과 러시아 등 국제사회에 대북제재 강화를 촉구할 명분도 없어진다. 남북 핵보유를 이유로 북한이 자신의 핵보유를 인정받는 상태에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역전술핵 전략을 쓸 수도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찰떡궁합인 아베 일본 총리가 전술핵 재배치를 빌미로 핵무장을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지, 전술핵 배치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부각돼 우리 경제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상황을 감내할 것인지는 고려 대상에서조차 빠진 듯하다.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이제 북핵의 노예로 사느냐, 죽느냐는 양자택일만 남았다”는 식의 극단적 주장은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주장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전술핵 재배치는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문제다.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지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가 필요하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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