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주 국립 전적지에
대통령 월급 석달치 지원
동상 철거 문제 함께 ‘시끌’
2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메릴랜드주 엔티텀 국립 전투 유적지 내 ‘신참자의 집’(Newcomer House). 가랑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 탓인지 한 두 명의 방문객만 보일 뿐 적막하고 음산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표지가 없었더라면 평범한 시골 방앗간으로 지나쳤을 이곳은 남북전쟁 초기 2만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기록된 엔티텀 전투 당시 북부군 부상 병사들을 간호하던 곳이다. 엔티텀 유적지 내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데다 관리소가 안내하는 투어 코스에도 빠져 있는 이 건물이 올 들어 주목받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월급 기부금이 투입되는 곳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월급을 전액 기부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지난 4월 첫 석 달 치 월급 7만8,333달러를 전쟁 유적지 관리를 위해 국립공원관리청에 기부했다.
하지만 지난달 초 샬러츠빌 폭력 사태가 터진 후 이곳은 또 다른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바로 ‘신참자의 집’에서 불과 40~50m 떨어진 언덕에 남부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이 자신의 애마를 탄 근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샬러츠빌 사태를 촉발시킨 리 장군 동상 철거 문제는 과거 역사 해석과 현재의 인종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논쟁적 이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자동차로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인종주의자의 명백한 책임을 외면한 채 동상 철거 측과 저지 측 모두의 책임을 거론하며 양비론을 피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사실상 리 장군을 자신들의 아이콘으로 여기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맹동을 눈감아 준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월급 기부금이 사용되는 곳에 리 장군 동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곱지 않은 시선도 커지고 있다. 이에 히더 스위프트 내무부 대변인은 최근 “대통령 기부금 사용처를 정한 곳은 국립공원관리청이며 기부금도 리 장군 동상에는 쓰이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신참자의 집’을 옆에 끼고 있는 리 동상 철거 문제는 정치적 논란으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민주당의 존 딜레이니 메릴랜드 주 하원의원은 샬러츠빌 사태 며칠 뒤 성명을 내고 “연방 영토에 남부군 지도자를 미화하는 동상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엔티텀 유적지 내 리 장군 동상 철거를 주장했다. 그는 2020년 대통령 선거 출사표도 던진 상태다.
신참자의 집 관리소장인 레이첼 니콜씨는 “최근 이 동상이 주목받으면서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며 “며칠 전에도 15명 정도가 몰려와 사진을 찍고 갔다”고 말했다. 그는 동상 철거 문제에 대해 “옮기려 해도 예산이 없다”며 농담을 던진 뒤 “그건 의회가 정할 문제”라고 거리를 뒀다. 국립공원관리청도 논란이 불거지자 “기념물이 현재의 가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입법적 절차가 없다면 기념물을 옮기거나 철거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정책”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이곳의 리 장군 동상은 국립공원관리청이 이 지역을 매입하기 전인 2003년 리 장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열성 남부군 지지자에 의해 건립됐다. 동상 하단에는 ‘리 장군은 개인적으로 분리주의와 노예제도에 반대했지만, 그의 고향과 자기결정권이란 보편적 인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결정했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노예제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을 ‘고향과 자기 결정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치환하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변형된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인종주의 역시 ‘자기 결정권’이란 미명 하에 진행되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의 역사 전쟁은 현재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샤프스버그(메릴랜드주)=글ㆍ사진 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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