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느와르 영화를 떠올려 보자. 그 영화의 주인공 얼굴에 이종석을 그려 넣어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이종석이 느와르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본인 역시 “느와르 영화를 항상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지가 잘 떠오르진 않았다”고 이야기 할 정도.
하지만 영화 ‘브이아이피’에서의 김광일이란 인물은 이종석의 맞춤옷인 듯 딱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종석을 위한 느와르로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이번 작품은 내가 가진 장점을 무기로 살릴 수 있겠다 싶었다. 이질감 없이 녹아들 거라고 생각했다”라며 대본을 보고 직접 찾아갔다는 그의 생각에 수긍이 가는 바다. 김광일 캐릭터는 여타 느와르 장르의 주인공과 달리 굳이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아하다. 이에 이종석이 가진 비(非)남성성은 ‘브이아이피’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이 더 강조되는 이유는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유독 선이 굵은 다른 주인공들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거나(김명민) 틈만 나면 욕을 지껄이는 인물(장동건)까지, 강하고 남성적인 모습을 쉬지 않고 드러낸다.
이종석은 “다른 선배들의 남성적인 모습이 부럽다. 물론 내가 가진 장점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러워만 하는 거다”라며 “김명민 선배 역할을 내가 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은 해봤다. 내가 인상을 쓰면서 담배를 물어도 위압감이 다를 거다. 다만 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테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기대하고 있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서른 되면 외모적으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일 모레가 서른인데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마흔이 될 때를 기대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그가 맡은 김광일은 한 마디로 소시오패스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최민식이 소시오패스를 연기했다. 두 캐릭터 모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짓을 일삼지만, 최민식이 뜨거운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종석의 사이코패스는 오히려 우아한 태도와 말간 웃음으로 자신을 잡으려는 인물들을 차갑게 비웃는다.
이종석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이코패스와 다를까 생각해 봤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또 그렇게 하기 싫더라. 외적으로 다른 모양새를 만들어 놨으니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보이면 조금 달라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긍정적인 인물을 연기하던 이미지가 컸기 때문에 ‘브이아이피’의 상반된 캐릭터는 팬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한 단계 뛰어넘기 위해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종석의 도전도 배우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원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아예 새로운 것을 원하진 않는다. 내가 가진 장점을 지겨워할 만큼 소진할 거다. 그렇게 되면 시나리오가 안 들어올 테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는 그대로 소멸해버릴 예정이다. 그 시점이 먼 미래일지 가까울지 모르겠다”라고 털어놨다.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이며 특히 ‘소멸’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가지고 왔다. 이는 진심으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자신감일까. 그는 “자신감과 그래도 된다는 마음 반반이다. 자연스럽게 그 시점이 오지 않을까. 그럼 절박해질 테고 절박함에서 엄청난 게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멈춰지는 게 아니지 않나. 내가 작품을 해도 대중들이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나도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배우로서 나아가려면 내가 찾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아직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정리를 잘 해 달라”라며 웃었다.
연기 변신이 간절한 것이냐는 질문에 이종석은 “배우가 연기 변신이라고 말하는 게 웃기다”라는 우문현답을 내놨다. 그는 “연기를 항상 잘 하고 싶었다. 예전엔 연기를 할수록 연기력이 늘어간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멈췄다. 언젠가부터 기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거다. 그래서 ‘브이아이피’가 새로웠고 선배들한테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종석이 연기력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은 지도 꽤 됐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어려운 부분은 ‘모르겠다’며 다 내려놓고 직접 선배들과 감독에게 도움을 구했다. 본인이 평가하기에 이종석의 연기력은 이번 작품으로 더 늘어났다고 봐도 될까. 그는 “늘어났기보다 완전히 새로웠다. 아직 새로운 게 남아있겠다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앞서 “소멸해버리겠다”는 말을 안심하게 만들 수 있는 부분. 특히 그는 그동안 다양한 직업군을 연기해왔지만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도 한 번도 안 해봤다. OCN 시리즈의 ‘완전 장르물’ 같이 마니아적인 것도 해보고 싶다”라며 가지 않은 길이 여전히 많다고 밝혔다. 아직 우리는 이종석의 모습을 빙산의 일각밖에 보지 못했다. 이종석의 앞으로가 기대되는 이유다.
이주희 기자 lee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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