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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배낭] 건물 지하ㆍ지하철, 오염 못막고 의료품 없어… ‘각자 알아서 생존’ 수준

입력
2017.09.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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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로구청소년문화센터 지하

안내 표지판 없고 고지대 위치

장기 대피 땐 60명만 수용 가능

#2

용산구 동자동 아파트 지하는

차 곳곳 주차… 대피공간 협소

#3

농어촌, 주택가는 대피소 없어

국민 대다수가 사실상 재난약자

총체적 안전비전 수립할 시기

민방위 대피시설로 지정된 서울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대피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벽에서 떨어진 채 기대 세워져 있다.(위 사진) 재난시 대피소 역할을 해야 할 이 지하주차장에는 한낮인데도 꽤 많은 차들이 주차돼 있다.(아래 사진) 김주은 인턴기자
민방위 대피시설로 지정된 서울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대피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벽에서 떨어진 채 기대 세워져 있다.(위 사진) 재난시 대피소 역할을 해야 할 이 지하주차장에는 한낮인데도 꽤 많은 차들이 주차돼 있다.(아래 사진) 김주은 인턴기자

정부는 지난달 23일 전국에서 민방공 대피 훈련을 실시하고, 직장과 집 주변의 대피소를 미리 알아두고 대피를 실천하라고 강조했다. 훈련 이틀 뒤인 25일, 서울의 대표적 주택밀집지역인 성북동 북정마을의 대피소를 직접 찾아가 봤다. 대피소 실태를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곤혹감은 커졌다.

북정마을 어귀에서 전국 대피소 위치를 알려주는 행정안전부의 어플리케이션 ‘안전디딤돌’을 켰다. 현재 위치에서 반경 500m 내의 민방위 대피소로 종로구청소년문화센터가 떴다. 통상 재난 경보가 울리면 5분 내에 대피하도록 돼 있다(5분도 늦다는 시각도 있다). 이를 가정해 뛰었다. 하지만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지대 쪽으로 올라가야 해 실제 이동 거리는 500m가 넘었고 시간도 15분이 훌쩍 넘겼다.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도 하나 없는 길을 찾아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평소 위치를 알아두지 않는다면, 스마트폰이 불통이라면 과연 찾아갈 수나 있을까.

대피소로 지정된 체조장 및 탁구장이 위치한 곳은 지하 1층. 핵 공격 상황에서는 가급적 지하 15m 이하(지하 3, 4층 이하)로 대피해야 한다. 15m가 안되더라도 일단 지하로 피한다면 생존 확률이 올라가고, 그마저 어려울 경우엔 30㎝ 이상의 콘크리트, 40㎝ 이상의 벽돌벽, 60㎝ 이상의 흙담 뒤로 피해야 방사선을 차단할 수 있다. 오염물질을 차단할 밀폐ㆍ여과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대피소가 내 안전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까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103.36㎡(31평) 규모의 시설이 수용할 수 인원은 120여명 남짓이다. 1인 당 최소 대피공간은 10시간 대피를 기준으로 0.82㎡, 14일 체류를 기준으로는 1.65㎡다. 장기 대피할 경우 단 60여명이 머무르기 적합한 공간이라는 계산이다. 북정마을 일대에만 약 500여 가구가 산다. 대피소 내 생수, 비상식량, 담요 등 구급용품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북정마을 주민은 “(대피소가 멀어) 혹시 비상상황이 생기면 노인정에 모여 대기해야 하나 싶다”고 푸념했다.

또 다른 주택밀집지역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 일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울역과 인근 신축아파트 지하주차장이 대피소로 검색된다. 더 가까운 대피소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이 곳 역시 깊이는 지하 2층 수준이었다. 주민의 상당수가 출근했을 낮 시간인데도 한 칸 건너 한 칸씩 차량이 주차돼 있어 실제 대피공간은 주차장 면적 6,871㎡에 크게 못 미쳤다. 차량이 꽉 들어찬 상황이라면 더 좁은 면적을 나눠 쓸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애써 생존가방을 꾸리고, 재난 시 행동요령과 대피소의 위치를 익히고, 경보 시작과 동시에 대피소를 향해 달려도 과연 안위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애초에 각종 재난에 모두 대비할 수 있는 1등급 대피시설은 극히 드물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 민방위 지하 대피시설 2만 2,819개소 중 핵 방호가 가능한 1등급 시설은 23개소로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1등급에 해당하는 화생방 방공호는 핵 공격, 낙진과 방사능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폭문, 오염 측정기 등을 갖추고 장기대피에 대비한다. 서울에서는 지휘통제소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울시 신청사 대피소가 유일하며, 경기 양주시청, 화성시청과 부산 강서구청, 기장군청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고층 건물의 지하 공간이나 지하철 터널(2등급)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곳은 장기대피시설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지하철 역을 방호기능(방폭, 오염물질 차단, 여과, 배기 등)을 갖춘 장기대피시설로 쓰려면 지하철역 공간 중 지하 2층 이하나 승강장 정도만 대피시설로 활용하고 이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상하수 배관라인 등)는 밀폐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화장실 등 위생시설은 대부분 지하 1층에 위치해 지하 2층 이하 대피공간에서 수백, 수 천명의 피난민이 장기간 머무를 경우 배설물 처리 방법이 마땅치 않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역시 오염물질을 막을 밀폐기능을 비롯해 송풍기나 여과시설, 화장실 등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다수다.

다층 건물의 지하층(3등급)이나, 단독주택 및 소규모 건물 지하층(4등급)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이조차 찾기 어려운 농어촌 지역이나 주택가에선 아예 대피할 곳도 없는 셈이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는 “공습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이 한 시간 이상을 견디려면 무엇보다 환기나 여과가 가능해야 하고 물 공급이 뒷받침 돼야 하는데 이에 대한 대피소 관리가 전무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재은 충북대 국가위기관리연구소장은 “사실 6ㆍ25 전쟁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닐 지경”이라며 “너무 쉽게 도시 주민들을 상대로 지하철 역으로 대피하라는 지침이 반복되는데 지하철이 없는 지방이나 주택밀집지역에서는 안전과 생명을 지킬 대피소 자체를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대피소 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식량, 생수, 잠자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부족해 지금의 관리 실태는 ‘각자 알아서, 살아서 만납시다’ 수준”이라며 “대피소도 모르고, 알아도 엉성한 현실에서 한국 국민 대다수가 사실상 재난약자”라고 꼬집었다. 이 소장은 “군사안보 위기를 맞아 국민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돌아보고 그야말로 국가의 총체적 안전비전을 수립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김주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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