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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진정 공정한 재판을 원하십니까

입력
2017.09.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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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때 잘 나가던 검사가 지금도 잘 나가는 기업 회장을 수사할 때다. 그 검사를 만날 때면 휴대폰이 유난히도 자주 울렸다. “그럼요. 그렇죠. 언제나 법에 따라서.”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고, 마무리는 대부분 한숨이었다. “좋은 학교 나와 좋겠어. 뭐가 그리 궁금한지.”

요는 이랬다. 회장이 졸업한 명문 고등학교 선후배들이 전화를 해댄다는 거였다. 유력 정치인 ○○○씨, 야당 의원 ○○○씨,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 ○○○씨 등등. 이름값이 화려했다. 통화 내용은 별 게 없었다. 대놓고 청탁, 무작정의 외압도 아니었다. 그저 ‘선입견을 가지지 말아달라’ ‘법에 따라 처리해 달라’는 식이다. 뻔한 얘기에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싶으면 ‘당신이 모르는 이러 저런 사정이 있지 않겠나’ ‘공정하게만 조사해달라’고 한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경찰이나 판검사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얘기가 참 많이도 들린다. “뭐 이래라 저래라 말할 위치는 아닌데”라며 겸손 아닌 겸손으로 시작. “수사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냐”는 염탐 아닌 염탐을 거쳐 “혹시나 해서 한 마디 하는 건데”로 이어지는 참견 아닌 참견. 결국은 “공정하게 수사(판결)해 주세요”로 마침표를 찍는 청탁 아닌 청탁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했다는 재판장의 일갈은 여러 사람을 뜨끔하게 할 일이었다.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 인턴 직원을 직원으로 채용해달라고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에게 청탁을 했는지 시비를 가리는 자리. 뭐가 그리 걱정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공정하게 봐 달라”는 요청을 거듭한 최 의원에게 재판장은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런 식으로 ‘공정하게 해 달라’는 전화가 자꾸 오는데, 절대 앞으로 주변 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 달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잘 나가는 그 기업 회장 선후배처럼, 최 의원도 학교 동문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최 의원 도움을 받았던, 이 참에 신세 갚겠다고 나선 지인들도 몇 명 있었을 것이다. ‘재판부에 제가 잘 말해놨다’면서 생색 한 번 내려 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최 의원이 누구인가. 지금은 거꾸러졌다지만 전 정권의 실세 중 실세였고, 지금도 유력한 야당 정치인 아닌가. “저는 그런 사람들 아는 바가 없다”고 멋쩍어하면서도 장담컨대 최 의원은 머리 속으로 사회 유력인사들 몇몇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재판장이 발끈한 이유를 유추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재판 당사자(최 의원, 검찰, 정당한 수임료를 받는 최 의원 변호인 정도)도 아니면서 남에 일에 기웃대는 ‘오지랖’이 일단 거슬렸지 싶다. ‘내가 이 정도 얘기하면 알아듣겠지’라는 은근한 기대감 섞인, 냄새 고약한 목소리에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을 테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함’이라는 게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정의의 저울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걸 재판장은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재판장 전화번호를 알아내 아무렇지 않게 전화하는 그 치들(이렇게까지 낮잡아보는 건 미안하지만)의 용감함은 참 눈꼴시다. 법학자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2009년 ‘불멸의 신성가족’이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국민 85.8%는 법조계 어디에도 전화 한 통 걸 곳 없다고 한 기억이 난다. 8년이 지났지만 그 수치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누가 봐달라고 했나. 공평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할, 그 뻔한 뻔뻔한 해명도 영 탐탁스럽지 않다.

이쯤 되면 최 의원 지인들 전화가 재판 스토리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가 궁금해진다. 못된 마음 조금 가져보자면 그들이 아닌 내 기준에 맞는 ‘공정한 결론’이 내려졌으면 좋겠다. 물론 난 재판장 전화번호를 모를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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