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나무를 인지한 것은 1990년대 한 영화로부터였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올리브나무 사이로’. 친구의 공책을 가져다 주러 골목길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이어서, 올리브나무 숲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화면 속의 올리브나무숲은 먹먹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로르카의 시가 있었다. 파랗게 마른 올리브나무. 절규들이 가득 열린 올리브나무. 안달루시아의 오렌지는 꽃. 올리브는 열매. 올리브열매는 노동과 힘과 견고함. 올리브 열매를 따고 있는 예쁜 얼굴의 아가씨들. 아가씨들의 허리를 감싸는 잿빛 바람. 하늘이 내려앉은 올리브 밭. 부채처럼 퍼졌다 닫혔다 하는 올리브나무 들판. 그렇게 올리브열매를 노래하던 로르카는 그라나다 인근에서 총살당했다. 한여름 올리브 숲 속에서. 아마도 매미가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숲의 붉은 흙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노래했던 것처럼.
그곳에 들고 싶었다. 언젠가는 올리브나무 숲길을 걸어보리라, 그 숲에 부는 바람을 느껴보리라. 올리브나무 사이에 숨어보리라. 숨어서 은빛 이파리를 세어보리라. 올리브나무를 키우는 안달루시아의 붉은 흙 위에 누워보리라. 올리브 열매 하나 입에 물고 낮잠을 자보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올리브나무는 내게 하나의 이미지이자 가 닿을 곳이 되어버렸다. 닥터지바고의 자작나무나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처럼.
올리브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의 실망감을 잊지 못한다. 스페인 배낭여행에서였다. 상상했던 것과는 참으로 달랐다. 왜소하고 궁핍하고 찌질하고. 꼭 비루먹은 강아지 같았다. 한겨울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란의 올리브나무와 스페인의 올리브나무가 다른 걸까. 사실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도시를 기차로 이동하며 다녔던 터라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았을 뿐이다. 가도가도 올리브 밭. 아무 감흥도 없는 지루한 풍경의 일부. 시는 시, 영화는 영화. 풍경은 풍경. 올리브나무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간단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올리브 맛을 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찝찌름하고 시큼하고 콤콤한 맛만 느껴졌다. 흔하기도 흔해서 맥주를 시키면 그냥 따라나올 정도니 귀한 줄을 몰랐다. 심심풀이 땅콩이나 될까말까로 여기던 것이 어느 때부턴가 올리브만 보면 일단 입에 넣고 보자 하게 되었으니 이건 또 무슨 변고인가. 그 짜디짠 올리브절임을 말이다. 그 짠 올리브절임에 더 짠 엔초비를 돌돌 감은 타파스를 보면 침이 줄줄 흐른다. 한 계절 맛볼 수 있는, 살짝 절인 그린올리브는 몇 보시기라도 먹어줄 수 있다. 어떤 맛이나 질감이나 향 때문이라고 딱 집어 말은 못하겠다. 그냥 그 모든 올리브절임이 다 맛있어졌다고 말할밖에. 올리브나무가 실제로 아름답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혀는 또 그렇게 풍경을 아름답게 만든다.
올리브나무 들판에 들어갔다. 아침안개가 자욱한 어느 겨울이었다. 마침 농부들이 열매를 수확하는 중이었다. 열매는 길고 검었다. 농부는 피쿠알(Picual)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발음을 고쳐가며 알려주었다. 튀김유로 써도 되는 아주 질 좋은 올리브유가 나올 거라고도 했다. 아침이슬에 젖은 블랙올리브는 어쩐지 농염해 보였다. 농부의 막대기가 올리브나무 가지를 후려칠 때마다, 올리브열매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이상하게, 허리가 배배 꼬였다. 예쁜 얼굴의 아가씨, 하고 누가 농을 거는 것 같았다. 맛을 들인 열매는 그래서 위험하다. 습관적으로 혀끝에 올려놓게 되니까. 그런데 생 올리브는 절대로 먹지 마시라. 정말 맛없다. 올리브열매는 왜 꼭 절여먹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향기로운 올리브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