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레, 다레, 쿠즈레, 사레!’
‘익숙해지면 긴장이 풀려 해이해진다. 그 후에는 흐트러지고 무너지는데 그런 배우는 떠나라!’는 뜻이다. 일본 극단 ‘사계’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들이다. 극단에서는 A4용지에 한 글자씩 써서 극단 복도와 각 극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초심과 긴장감을 잃지 말라는 당부였다.
말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연습할 때마다 극도의 긴장이 흘렀다. 당시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인 아사리 게이타 선생은 돈을 주고 온 관객이 공연을 본 후 돌아가며 ‘오늘 참 좋았다. 다음에 또 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공연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배우들을 독려했다. “(노래를 부를 때) 한 음이라도 틀리면 나가라!”고 했다. 잣대가 그토록 엄격했다. 배우들은 자신을 돌아보며 어떻게 매일 최상의 무대를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이 65년 동안 사계를 ‘나날이’ 발전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여름에 중국 대학에서 활동하는 한중일 출신 교수들이 일본에서 모였다. 오랜만에 아사리 게이타 선생께 연락을 하고 찾아 뵈었다. 지금은 극단 사계에서 나와 개인 극단에 서 연출을 하고 있다.
내가 도착했을 때도 80이 넘은 나이에 제작부 사무실에 앉아 캐스팅 표와 보고서를 보면서 제작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선생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중국에서의 활동을 칭찬했다. 중국 활동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야래향’으로 이어졌다. 선생이 갑자기 내게 말했다.
“야래향을 중국어로 불러줄 수 있겠나?”
선생은 극단 사계에서 야래향을 처음 부른 가수였던 이향란(야마구치 요시코)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옆에는 대선배 두 분과 제작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며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야래향을 불렀다.
10년 전 선생 앞에서 덜덜 떨며 오디션을 봤었다. 세월이 지나 이렇게 가까이 앉아 노래를 선물하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하아! 좋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선생은 좀체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사계에 있던 시절 베테랑 배우들에게 '나레, 다레, 쿠즈레, 사레'를 강조하면서 배우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을 수없이 봤다. 게다가 일본인답지 않게 감탄사라니!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쟁여두고 있던 감사의 말을 전했다.
“배우의 자세를 엄격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리라고 말하던 외국인 배우에게 투자해 무대에까지 세워주신 것에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은 10년 전에 하고 싶던 말이었다. 그때는 진심이 다른 의도로 왜곡될까 두려워 묵혀두었었다. 선생이 다시 말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네. 일부러 찾아와 말해줘서 너무 고맙고.”
선생은 여러 번 악수하면서 인사했다.
선생은 한국과 중국에서 온 배우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이 지금 한중일 뮤지컬 교류의 발판이 됐다고 믿는다.
그때엔 야속했던 엄격함이 스승의 큰 관심이고 사랑이었음을 느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초심을 잃지 않는 배우,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배와 스승이 되고 싶다. 먼 훗날 제자들이 찾아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내게 노래 불러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할 날을 꿈꿔본다.
홍본영 뮤지컬 배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