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라는 영화가 있다. 범행 현장에 있었던 시각장애인 주인공이 눈이 안 보이는 대신 탁월하게 발달한 청각과 촉각 등을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스릴러물이다. 눈이 가져오는 간섭을 배제한 탓에 다른 것들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6월, 정부에서는 공공부문에서 블라인드(Blind) 채용을 의무화 하겠다고 발표했다. 학력과 가족관계, 출신지 등에 대한 정보 제공 없이 필기시험과 블라인드 면접을 통해서 채용하는 방식이다. 본질은 배경이 주는 간섭을 배제하고 능력을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외모, 가족사항, 출신지를 배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문제는 학력과 학점이다. 대학입시까지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는 입장과 과거 수능 성적을 기준으로 평가 하는 것이라면 대학 입학 이후 노력 역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는 입장이 대립한다. 대학입시 전과 후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학점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성실성 척도로 사용하자고 하지만 대학별 편차가 크고 인플레도 심하다. 일정 학점 이하라면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나 기준선을 넘은 학점인데 비교대상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객관적 지표가 되기 어렵다. 결국 필기시험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시험과목 위주의 공부만을 조장하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일정 학점 이상을 구간화하고 차등 점수를 부여하여 보완적 지표로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 하다.
블라인드 방식은 작게는 채용의 문제이지만 크게는 기회균등이라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은 평생을 좌우한다. 그러다 보니 삶 전체를 통한 노력의 결과보다 입시라는 단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패자부활전이 주어지는 일도 사실상 매우 어렵다. 균형이 깨지고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하지도 지속가능 하지도 않다. 따라서 평가방식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블라인드 선발을 해보았던 공공기관들과 로스쿨의 경험에 따르면 학교정보를 주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학교 출신들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블라인드 선발이 갖는 긍정적 가능성이다. 블라인드 방식을 공공부문이 아닌 민간기업에도 강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민간부문에서도 외모, 가족배경, 출신지는 제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 없이 나머지 요소를 강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자발적 선택에 따르도록 하되 인센티브를 통해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의 블라인드 방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가공된 자기소개서의 작성과 임기응변식의 화려한 언변이 합격에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성 평가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운에 따라 합격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간 국가공무원 선발에서는 블라인드와 나름의 정교한 면접질문 및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새로운 평가방식의 개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좋은 인재를 뽑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자가 인색했다.
블라인드 선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펙’을 대체할 새로운 평가체계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나는 시간의 75%를 핵심 인재를 찾고, 배치하고 보상하는 데 썼다”는 잭 웰치의 이야기는 되새겨볼 만 하다. 금번 블라인드 채용은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사회적 가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정부가 블라인드 채용의 성공을 위해 균형을 갖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이유이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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