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 파편이 쉴 새 없이 날아 다녔다. 선수들이 킥을 하기 위해 발을 디디거나 지면을 박찰 때마다 잔디가 한 움큼씩 뽑혀나갔다. 스터드에 실린 무게 중심을 잔디가 받쳐 주지 못하니 선수들은 속절없이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공의 방향마저 어디로 튈 지 예측할 수 없었다. 누더기가 된 그라운드에서 공은 90분 내내 허공만 갈랐다.
8월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과의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졸전 끝에 득점 없이 비겼다. 관중석을 붉게 물들인 6만여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골문 안으로 향하는 슈팅(유효슈팅)이 단 한 개도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경기였다. 후반 7분 이란 선수의 퇴장으로 맞은 수적 우세마저 살리지 못하면서 본선 행을 결정짓지 못했다. 대표팀은 6일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경기에서 또다시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한다.
경기가 끝난 후 손흥민(25ㆍ토트넘)은 열악한 잔디 상태를 꼬집었다. 그는 “잔디 상태에 화가 난다. 매번 이런 잔디에서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원정 경기인가’, ‘상대도 똑같은 조건’, ‘좋은 목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 등의 비판이 인터넷과 SNS 상에서 빗발쳤다. 신태용 감독은 “이란도 같은 조건이지만 이란 선수들은 잔디가 밀리더라도 치고 나가는 힘이 있다”며 “우리 선수들은 중심이 밀려 넘어지기 쉽다”고 진단했다.
선수들의 ‘잔디 탓’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최상의 컨디션을 갖춘 잔디구장에서 뛰는 ‘유럽파’ 선수들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열악한 잔디 상태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아 왔다. 기성용(28ㆍ스완지시티)은 지난 3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7차전 경기를 마친 뒤 “경기를 할 수 없는 정도의 잔디 상태”라고 평가했다. 구자철(28ㆍ아우크스부르크)도 지난해 11월 5차전 경기가 끝난 후 “잔디 상태가 너무 안 좋다. 패스로 경기를 푸는 데 지대한 악 영향을 미친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선수와 팬들의 우려가 계속되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관리하는 서울시설관리공단은 이번 경기를 앞두고 잔디 관리에 배정된 1년치 예산의 절반 가량인 7,000만원을 들여 잔디를 보수했다. ‘콘서트나 대형 집회 때문에 잔디가 훼손된다’는 지적도 있어 8월 19일 이후엔 대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에 통풍마저 잘 되지 않아 새로 심은 잔디는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전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에서 떨어져 나온 잔디 파편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경기장은 순식간에 ‘논두렁’ 또는 ‘지뢰밭’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잔디’는 무기력한 한국 축구를 따라다니는 핑계거리가 돼 버렸다.
한 네티즌은 인터넷 상에서 벌어진 잔디 논란에 대해 의미심장한 댓글을 달아 큰 공감을 얻었다. ‘이런 특별한 상황을 홈구장의 이점으로 활용 안하고 뭐 했나’.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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