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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이후 소녀의 50년

입력
2017.09.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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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기억과 함께 산다' 스틸 사진 중 하나. 다음 영화
다큐멘터리 '기억과 함께 산다' 스틸 사진 중 하나. 다음 영화

“생리가 멈추지 않을 때마다 ‘왜 내가 계속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했어. 옛날(위안소 생활)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힘들어 보였지만 할머니는 반세기 동안 겪었던 위안소 생활과 이후 50년 인생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갔다. 지난 달 30일, 서울 마포의 탈영역 우정국에서 열렸던 ‘여성주의 시각으로 읽는 군 위안부 다큐 상영회’에서 화면으로 소개된 고 강덕경(1929~97년) 할머니의 모습은 그랬다. 강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은 이날 DMZ국제다큐영화제와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주최로 열린 이번 상영회에서 공개된 일본 도이 토시쿠니 감독의 ‘기억과 함께 산다’(2015년)의 내용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강 할머니는 경남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1944년 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 도야마현 후지꼬시 공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고된 노동과 배고픔을 견디다 도망을 쳤지만 일본 장교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한 이후 위안소로 넘겨져 약 4개월 가량을 보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강 할머니는 부산 등에서 식당일, 비닐하우스 농장 일 등을 하다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후 증언 활동을 이어갔지만 1997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다큐멘터리 '기억과 함께 산다'의 스틸컷 중 하나. 강덕경 할머니. 다음 영화
다큐멘터리 '기억과 함께 산다'의 스틸컷 중 하나. 강덕경 할머니. 다음 영화

‘위안부 4개월’을 끊임없이 돌아봐야 했던 50년

위안소에서 해방을 맞은 강 할머니는 뜻하지 않게 가진 아이를 부산의 한 천주교 고아원에 맡겼다. 그는 “그때 아이에 대한 애정이 하나도 없었다”라면서도 “신부님에게 안겨서 들어가는 아기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부산에서 식당 일을 했던 강 할머니는 아이를 보기 위해 고아원에 갔지만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만 접해야 했다. 강 할머니는 “내가 아이의 모습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며 “그 이후로 내가 타락을 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죽음 이후 강 할머니는 술과 남자에 의지하는 나날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족을 만들지는 못했다. 강 할머니는 “위안소에서의 경험 때문에 남자들이 너무나 싫어졌다”며 “나 좋다는 사람이 생겨도 위안소 생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저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말했다.

고통은 이어졌다.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질병에 시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강 할머니는 “자궁에 문제가 생겨 계속 하혈을 했다”며 “서울의 유명한 산부인과까지 찾아가 번 돈을 몽땅 산부인과에 넣었다”고 말했다. 하혈을 할 때마다 그는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하는 한탄과 함께 위안소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1980년대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살았다. 약 10년을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91년 농장의 낡은 TV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밝히는 기자회견과 방송 프로그램들을 보게 됐다. 강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람이 나왔는데도 일본은 계속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걸 보니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웃집 전화로 위안부 문제를 다룬 TV프로그램에서 안내하는 전화번호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연락을 취해 위안부 피해자임을 드러내고 이후 증언 활동을 계속했다.

강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분노와 책임자 처벌 요구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의 “지금 가장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강 할머니는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그 그림을 그리고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고바야시(일본 공장에서 도망친 자신을 잡은 일본군 장교) 한 사람에게만 (강간을) 당했으면 내가 정신대였다는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런데 위안소에서 너무 많은 군인을 상대하면서 분함이 몸에 배였다”고도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1997년2월 강 할머니의 폐암 증세가 악화돼 사망하기 5일 전의 모습까지 담았다. 영상에서는 생과 사투하는 강 할머니의 모습과 그의 손을 붙잡으며 기도하는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강 할머니는 “여자친구들과 끌어안고 많이 울기도 했다”며 “그들이 많은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 중 하나인 '빼앗긴 순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 중 하나인 '빼앗긴 순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군 위안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매매의 문제로도 봐야”

다큐멘터리 상영 후 강연을 진행한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군 위안부 이야기를 국가적인 의제로 다루는 걸 크게 선호하지만, 군 위안부 할머니의 경험을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성폭력, 여성 인신매매와 성매매 문제로 다루는 건 너무나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의 근본적인 인권 측면에서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김 교수는 “군 위안부 문제는 나를 잡아간 사람을 하나하나 고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의 폭력 행위였다”며 “국가나 사회단위에서 여성에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힘을 보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는 외교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과 동시에, 여성들에게 닥친 거대한 집단의 폭력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달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하상숙(89) 할머니에 이어 이틀 뒤인 30일 이모(93) 할머니가 별세했다. 올해 벌써 5명이 고령과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5명으로 줄었다.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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